나는 한글이 우수해서 잘 쓰려는 게 아니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한글 모든자모말(pangram), 노스모크의 DeHol 작. (산돌제비체)

말은 똑바로 하자. 한글은 세상에서 ‘제일’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언어’가 아니고 표음문자로서의 순수한 기능성에 제법 충실한, 한국의 문화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지닌 문자다. 이 정도만으로도 보존하고 보다 깊이 탐구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한글이 불규칙한 돌출적 특성 투성이고 새로 배우는 데 너무 어려워 세상에서 가장 익히기 힘든 문자로 꼽히는 허접한 문자래도 ‘아끼고’ ‘사랑’할 수 있다. 내가 날 때부터 써 온 내 의식의 일부라는 이유로 충분하다.

한글을 향한 따라 죽을 순애보 — 한글날엔 눈 닿는 곳마다 절절한 고백 편지

인터넷에 ‘미국인이 본 한글의 우수성’이라고 도는 글이 있다. 영어로 쓴 글에 우리말 번역을 달아놨는데, 영어를 어느 정도 하는 사람이면 단번에 「미국인이 썼다」는 것은 뻥임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 가운데 의외로 정말 철저히 한국식 영어교육을 받고 자란 이가 아닌 이상 그 따위로 작문을 했을 리가 없다. 누가 봐도 한국인이 스스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을 참아가며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해석문은 「8,000여가지 소리를 구분해서 적을 수 있다」를 「소리나는 것은 다 쓸 수 있다」로 자신있게 판올림하여 옮기는 등 허풍에 힘을 싣느라 여념이 없다. (바람에 낙엽 날리는 소리도 거뜬히 써낼 수 있을 것 같다.) 글 내용을 보면 ‘그러므로’나 ‘따라서’가 원인과 결과를 잇는 단어라는 사실도 잘 모르고 쓴 듯 억지가 가득하고 심지어는 다른 문자체계들을 깎아내리며 (대체 이유를 모르겠지만 ‘라틴어’도 같은 선에서 언급하고 있다. 라틴어가 없어져서 로마자가 열등하다는 주장인 듯…….) 한글이 어째서, 어느 각도로, 보나마나하게 세계최강문자일 수밖에 없는지 써 놓았다.

마지막 문단은 읽은 즐거움이 하루 종일 지속될 정도로 강력하다: 「윈도우 95 화면을 보고 더블클릭을 하는 순간 한글의 위력은 500년이란 시간의 벽을 넘어 손끝에서 살아 숨쉰다.” 더 이상의 분석은 생략한다. 워낙 옛날 글이긴 하지만 올 한글날에도 어김없이 새 펌글이 내 눈에 띄었다. (애매하게도 가장 조회수 높은 펌글이 있는 블로그 부제에는 「나도 영어를 잘 하고 싶다」라고 써 있다.)

「세계문자올림픽에서 금메달 받은 문자니까 아껴야 해」

앞의 내용은 조금 극단적인 예지만, 대부분의 매체에서 한글에 대해 쓰는 글도 천편일률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오늘 올라온 따끈따끈한 소식으로 한글이 ‘세계문자올림픽’에서 2년 연속 금메달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미국의 뻥 전문 신문 The Onion에서 읽은 풍자 기사 제목이라 해도 믿을 이 괴상한 내용의 기사를 읽고 관련 내용을 찾아보니 그러면 그렇지, 애초에 한국이 열고 한국이 베풀고 한국이 받은 정황이 다분한 함량미달의 행사였음이 분명해진다. 한식 세계환지 뭐시기에 영부인이 이백억을 쏟아넣었다는 데에 화 내느라 피곤한데 이런 식으로 ‘한글 홍보’에 드는 돈도 한 두 푼이 아닐 텐데 아까울 따름이다. 이런 건 정말 검색 돌리면 바가지로 쏟아져나온다.

외국 이 나라 저나라에서 말을 글로 옮길 문자가 없는 민족이 한글을 채택했다는 종류의 기사도 종종 나오는데 이 역시 상당수가 부풀려진 자화자찬인 경우가 많다. (인도네시아 한 소수민족 관한 얘기는 아예 와전된 허위사실이었다.) 여러 민족의 말을 옮기는 문자가 우수하다면, 한글은 로마자의 손자뻘 정도에 머물 것이다. 또한 문자가 없어 남의 문자를 빌려야 하는 소수민족의 사연은 근본적으로 안타까운 것으로, 본디 언어는 긴 시간 동안 사용한 민족과 함께 발달해 온 고유한 문자로 해당 문화 안에서 쓰이는 것이 제일이지 아무리 우수하다고 다른 문자를 취해서 얻을 것은 없다. 영어도 「아이 앰 어 보이」로 한글로 써 가며 배우는 데 장점이라 할 만한 게 없는 것처럼…….

한글날을 공휴일로……. 일 년 내내 언문 취급하다 하루 시켜주는 ‘왕 놀이’

한글학회 등에서 주장하고 인터넷 여론이 올라타고 노동계와 민주당 등이 본격적으로 갖고 나온 한글날 공휴일 재지정 논란, 이것도 내용을 보면 「세계 유례없는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우리 유산」이기 때문이라는 등의 활활 타오르는 수사가 난무한다. 한글이 국사에서 특히 강점기 때 한국 민족의 정체성을 담았던 값진 그릇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맞고 광복 대한민국의 문화적 주체성을 기념하기 위해 한글날을 지낸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 유래를 지켜서 그대로 기념했으면 좋겠다. 한글이 다른 문자보다 태생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일 년에 하루는 집에서 쉬면서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는 것은 힘든 말이다. 공휴일에 쉬면서 ‘에버랜드’도 가고 ‘테이큰 투’도 보면서 (둘 다 한글로 표기했으니 한글의 우수성 만세다) 그 의미를 새기면 되나? 평생 불효자식이 어버이날 챙기는 것보다 더한 가식이다.

글 똑바로 쓰는 것과 한글 똑바로 쓰는 것은 둘이 아닙니다

나는 평소에 우리말로 쓴 글에 영어를 섞는 것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다. (물론 아주 옛날에는 안 그랬다.) 완전히 한국어화된 외래어인 ‘카메라’도 ‘사진기’라고 쓸 정도지만 한글이 과학적이어서도 한국어가 위대해서도 아니다. 단순히 한국어 특유의 전통적인 결이 조금이라도 살아 있는 글이 의미도 더 널리 전달되고 한국어적 감수성도 더 잘 느껴지고 내 한국어 구사 능력 개발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다. 영어로 쓸 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영어로 쓴다. (섞어 쓰는 데에 반감이 있어서라기보다 섞는다면 뚜렷하게 의도한 효과를 내기 위해서만 쓰고 싶다.) 모두 내가 익힌 언어를 조금 더 제대로, 사고하며 쓰기 위한 노력이다. 나는 한글로는 좋은 국문을, 로마자로는 좋은 영문을 쓰고 싶을 뿐이지 한국어나 한글이 파괴되는 것을 방둑에 손가락 꽂는 심정으로 막아보려는 그런 사명감은 없다. 사명감을 갖는다고 기념하고 말만 하면서 정작 평소에는 손 놓고 있다가 어느날 형편없이 흐릿해져 버린 모국어를 만나게 된다면 참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파괴를 걱정하는 것은 ‘한글’이 아니라 ‘한국어’라는 점부터 좀 그만 헷갈리자. 그리고 문자는 우수해서 소중한 우리것인 게 아니라 애초에 우리것이기에 소중할 뿐이다. 무엇보다 나라와 민족에 자긍심을 갖겠다는 일념 아래 있는 것 없는 것 다 끌어다 「이래서 우리가 대단하오」 하며 만족하는 모습, 없어 보여서 싫다. 그냥 한국인이니까 한국에, 한국어 화자니까 한국어와 한글에 자연스러운 애착을 가지면 된다.

한글날을 기념하는 데에 동원되는 수사가 상당 부분 부적절함을 지적한 것일 뿐, 공휴일 확대 차원의 한글날 재지정은 나도 찬성에 가깝다. 물론 공휴일을 늘리는 것보다 근무시간 단축과 휴가보장 등이 더 중요하지만……. 어쨌든, 근로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쉬어야 해서이지 한글이 시간의 벽을 넘어 손끝에서 살아 숨쉬기 때문은 아니다.

  1. ...

    글 전반적으로 한국어와 한글을 헷갈려하는거 같다가도, 아닌거 같다가도…

  2. 김괜저

    대체 어디가……. 맥 빠지네요.

  3. Bluegazer

    정말로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는 사람이 이 포스팅을 읽으면 뭐 내용 이해가 좀 힘들긴 하겠네요.

  4. ...(2)

    한국어와 한글을 헷갈려하는 건 댁 쪽인 것 같음.

  5. 월요일

    한국어와 한글을 헷갈려하는 건 댁 쪽인 것 같음3333

  6.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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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김괜저

    예전에 잠깐 일한 곳에서 구매해 준 것으로 낱개로 구할 수 있는 법은 저도 모르겠습니다ㅜㅜ
    실패의 기억을 만회할 수 있겠군요 축하드립니다.

  8. SUTHERLAND

    상관없는 질문인데요, ‘다’와 ‘이다’는 어떻게 구별해 써야하죠?

  9. 김괜저

    저도 어떻게 설명해야 맞는지 고민되네요. 다만 예전에 찾아봤을 때 ‘이다’의 ‘이’는 탈락할 수 있다고 읽었습니다. (둘 다 맞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뜻)

  10. babo

    한식을 저렇게 세계화시키는 자체가 조금 우습네요. 영부인은 그 돈 어디다 쓴건가요?

    영어를 모르니 저런게 떠다녀도 그대로 믿는것같아요. 바른지적,좋은정보에 감사!

  11. 681

    제대하니 맘에드는글이 훨씬 많아졌다

  12.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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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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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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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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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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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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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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