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튜버 얘기만 했다.

월간 《현대문학》에 또 한 번 글을 쓸 수 있는 운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 주제가 ‘세상에 없는 책’이었다. 평소에 책은 안 읽고 유튜브만 보고 있었던 터라 딴에는 솔직하겠다고 유튜버들이 나오는 소설집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써냈다. 〈구독한 사랑〉이라는 제목을 붙인 그 글이 실린 1월호를 읽는 중이다.

「(…) 나는 일단 최근 읽었던 책들을 생각해보는 데서 출발했다. 떠오르는 책들이 변변하지가 않았다. 사실 책다운 책을 별로 못 읽고 있어서인 것 같다. 요즘 내 여가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 건…… 유튜브가 틀림없다.」

믿음으로 궤도 진입

2013년에 <도미노> 3호에 실렸던 글인데 최근 트위터를 하다가 생각나서 여기에 옮긴다. 허락해주신 필진들께 감사드린다.

조국호

2002년 여름, 중학교 미술선생님은 동판공예 실기평가가 끝나고 나를 담배연기가 자욱한 미술실로 불렀다. 선도부장을 겸하던 카리스마 넘치는 선생님이었다. 「감각이 괜찮네. 예고 한 번 안 가볼래?」 나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저 민사고 준비하는데요.」 선생님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채 살아온 사람처럼 출석부를 가만히 내려놓더니, 이마를 짚으면서 말했다. 「그래, 알았다. 미안하다.」

공식적으로는 없기로 한 한국 고등학교 서열 꼭대기에 민족사관고등학고와 대원외국어고등학교가 군림하는 그림이 강남 뿐 아니라 전국의 학교와 가정과 학원가에서 상식으로 통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많은 학교들은 민사고나 특목고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특별히 관리했고, 수업을 빠지고 따로 마련된 교실에서 자습을 할 수 있게 허락받은 친구들도 있었다. 그럼 그 선생님은 모두가 애지중지하는 민사고 준비생을 몰라봐서 미안하다는 뜻이었을까?

민사고는 민사고 이전부터 나를 규정지었다. 학원가에서는 고등학교 입시 학원들이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고, 거기에서도 민사고 준비반, 외고 준비반, 과고 준비반, 일반 내신반 이런 식으로 학생들을 나누었다. 민사고반 학생들은 성적이 나쁘면 외고반으로, 외고반 학생들은 일반반으로 강등될 위험에 처하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잠깐 외고반에 사귀는 친구가 있기도 했는데 내가 공부한 내용를 세 달 정도 뒤에 그 친구가 공부하게 되는 식이었다.

미술선생님과는 달리 담임이었던 음악선생님은 내게 미안해하지 않았다. 「피아노를 치니까, 민사고 원서에 그것도 꼭 쓰렴.」 안양에 있는 우리 학교는 그 해 나와 나의 같은 반 친구를 민사고에 합격시켰고 부산영재고에도 한 명, 외고 대여섯 명을 배출해 평촌 학원가를 사이에 둔 라이벌 학교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었다. 학교 정문에 내 이름과 함께 민족사관고 합격이라고 써붙인 현수막이 내걸렸다. 까만 헤드라인체로 가득 메운 그 현수막은 우리 집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나는 가끔 그 현수막이 내 무덤 위에 내걸리는 악몽을 꾼다.


민사고에서 나는 삼 년간 <민족 주체성 교육>을 받았다.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이 말은 사실 구체적인 교육과정이라기보다 조국의 미래를 맡길 엘리트를 양성하는 최선의 방법이 외국 대학으로 보내는 것이라는, 당나라 유학생부터 신사유람단까지 이어지는 유서 깊은 아이러니 때문에 혹여나 혼란스러워지지 않도록 뿌리를 가르치자는 의지가 반영된 구호였다. 실제로는 한복을 입고 한옥에서 공부하면서도 우리의 일상은 유학 준비생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훨씬 컸다. 즉, 우리처럼 한복을 교복으로 입는 서울국악예술고보다, 함께 SAT를 공부하고, 대외활동마다 마주치는 대원외고 국제진학반 학생들과의 동질감이 훨씬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특목고 학생들에게는 없는 무게감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데, 청와대 같은 건물에서 수업을 듣고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귀가 버스에서 줄지어 내릴 때 쏟아지는 시선을 즐기거나 견디며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장손의 마음가짐> 같은 것이었다.

민사고 개교와 대원외고 국제반 개설을 기점으로 보면 현 세대 학부유학의 역사는 십 오년 정도다. 그 전까지 1퍼센트를 꿈꾸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경전은 홍정욱의 『7막 7장』이었다. 이 책은 중·고등학교 조기유학·영미 명문대 코스에 대한 근본 없는 욕망을 훌륭하게 자극했지만, 어디까지나 <따라올테면 따라와 보라>는 관점에서 쓴 책이었다. 거물급 정치인에게서 직접 받은 추천서를 내고 초우트로 떠나기까지의 고민 중 재미없는 돈 얘기는 한 구절도 없는 이 세련된 책은 마침표가 없고 이어령이 추천사를 썼는데, 가자미형 인간과 참치형 인간을 대비시키며 그를 치켜세운 대목은 많은 이들이 홍정욱 본인의 문장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기도 하다.

2000년대 중반, 『7막 7장』의 자리는 『공부 9단 오기 10단』(박원희),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김현근)로 대표되는 친절하고 구체적인 특목고·학부유학 성공기들이 차지했다. 이들은 자신은 천재도 최상류층도 아닌, 오기와 열정으로 유학길에 오른 평범한 학생이었음을 강조하며 지금 하는 공부를 끝내주게 잘한다면 누구나 민사고나 영재고를 나와 하버드를 갈 수 있다고 친절하게 말한다. 집안이 어려워서, 또는 천재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느꼈던 좌절을 쓴 장들은 홍정욱의 철저한 과시형 성공담에는 없는 꾸밈없는 문체로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넓은 폭으로 사로잡았다. 내가 민사고를 졸업할 때 쯤 이미 아이비리그 입학 성공담은 한두 권의 베스트셀러가 아닌 중앙일보 교육면이나 인터넷신문에 심심하면 올라오는 비교적 흔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대학 결과가 한창 나오는 계절에 우리는 쉬는 시간에 친구 아무개의 <몇 개 대학 동시합격> 기사가 뜨면 우르르 달려가 확인하고 보도사진을 보며 놀리곤 했다. 이 친구들은 어김없이 주변 청소년들과 어머니들로부터 멘토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지금의 유학생들은 박원희(1987), 김현근(1987)의 책을 읽고, 김현근은 홍정욱(1970)의 책을 읽고, 홍정욱은 국립외교원장 김병국(1962)의 책을 읽었다.

2000년대 이후 특목고·학부유학은 사회지도층 진입을 위한 모범 코스로 대한민국의 마음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제 유학길 오르는 영재의 모습은 몇 사람이 아닌 몇 개 학교 전교생의 모습으로 대폭 확대되었다. 그 중 민사고는 사교육이나 입시 비리에서 자유롭기 힘든 도심의 학교들과는 달리 <겨레의 미래를 책임질 지도자 양성>이라는 목표의식을 부각시킬 수 있었고 사교육에 강제 점령된 서울의 임시정부같은 후광까지 생겼다. 민사고에 직접 머물며 취재한 몇 편의 지상파 다큐멘터리는 소등 후 새벽에 낚시용 랜턴을 켜고 공부하고, 동 트자마자 맨발로 뛰어서 아침 운동하러 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집요하게 조명함으로써 그 과정의 치열함을 낭만화했다. 이런 접근들이 자극하는 정서는 주로 부러움 또는 박탈감이었지만,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해 주십시오」라고 왠지 존댓말로 당부하는 택시 기사들과 포털 댓글들의 묵직한 기대도 있었다. 우리는 세계적 지도자가 되라는 말을 인사처럼 들었고, 교훈인「출세를 위한 공부가 아닌 학문을 위한 공부를 하자」를 월요일 아침마다 외웠다. 거르고 거른 모범생 군집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동네에서 한 가닥씩 하던 공부벌레로서의 자존심은 금세 가루가 되었지만, 대신 그 자리에 나라를 빛낼 구국적 인재라는 공동의 정체성이 딱지처럼 앉았다.

우리는 보기 좋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했다. 색색의 개량한복에 어울리는 패딩을 덧입은 채 무거운 원서를 들고 덕고산 내리막을 구르듯 뛰어 등교하는 우리의 모습은 누가 봐도 근초고왕처럼 진취적이었다. 물론 밤마다 영동고속도로 휴게소의 불빛을 보며 울거나 우울증에 드넓은 교정에서 몇 시간 행방불명되는 경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집단으로서 우리가 풍기는 가장 확실한 기운은 새파랗게 빛나는 진정성, 그리고 태양같은 목표의식이었다.

사물놀이와 대취타, 영자신문, 오케스트라 자선공연, 모의 UN 회의, 도민체전, 사랑의 집짓기 등 셀 수 없이 많은 활동들은 영미권 대학에 합격하려면 활동경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직접적인 배경이 있었지만, <출세하려고 공부에만 매달리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포장되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란 핀잔이 아닌 미래를 위한 자기개발이란 부러움이 따라왔다. 우리 모두는 착한 스펙으로 무장한 누군가의 엄친아가 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지금도 특목고·자사고 영재들은 <중국의 동북공정 반대 플래시몹>이나 <한류 홍보 앱 개발>과 같은 진정성 넘치는 활동들로 연일 중앙일보 교육면을 장식한다. 우리는 사회가 기특해하고 명문대가 반기는 진정성 있는 영재의 모습을 일찍이 깨닫고 그를 충실히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지점에서 확실한 적성을 증명했다.

아무리 새벽 운동이 힘들고 시험이 어렵고 연애를 금지해도 (어쩌면 연애를 금지해서) 그 진정성의 땅에 냉소나 비관이 싹을 틔우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우리는 초(외국에서 다닌 학생의 비율이 아주 높다)·중·고 생활의 배경이 거의 모두 다른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동안 나머지 친구들과 공감하기 힘들었던, 예컨대 영어선생님의 설명이 틀렸다는 것을 반에서 혼자만 알 때의 내적 갈등이나 점심시간에 책을 읽는다고 놀림을 받던 기억 따위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찍이 단절된 <평균적인 학창시절>과 <근심 없던 외국에서의 어린 나날들>의 짧은 기억들을 떼어내어 향수로 소비하는 성향이 두드러졌다. 토플을 다달이 보고 수능 범위 수학까지 선행학습하던 중학교 시절은 빼빼로데이와 학원가 김밥천국에 대한 쌉싸름한 추억에 멈춰섰다. 또 어릴 때부터 영어교육 차원에서 보며 자란 디즈니 애니메이션 노래들을 지하실에 모여서 부르며 잠깐 머물렀던 미국의 플라스틱 냄새를 그리워했다. 우리의 과거라고 하기에는 맥락에서 이미 벗어난 그런 것들을 열렬히 그리워하며 그것을 태워 연료로 썼다. 하나둘 대학에 합격하고, 떠날 준비를 시작할 때 쯤, 우리는 그런 그리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있을 곳은 저 넓은 바깥세상이지 않을까란 생각에 흠뻑 젖은 채, 제법 진지하게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되러 나간다는 생각을 의식에 심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학교와 가족, 그리고 수많은 모르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한국 공교육 체계에서 광명성처럼 멋지게 쏘아올려졌다.


발사 직후, 잠깐 동안 세상이 조용했다. 눈부신 진학성과에 쏟아지는 만인의 관심에 익숙했던 우리는 곧 그 순간이 끝이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에 허무해하기도 했고, 그 뒤의 목표 설정에 참고할 책이 마땅치 않아 당혹스러워하기도 했고, 우리가 각국 사회의 면면으로 흩어진 후 분화하여 적응하는 과정에서 공통의 정체성은 유통기한을 다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대입 이후 우리의 안녕을 물어오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매체에서 유학생들을 다루는 방식은 성공이냐 실패냐에 완고히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우리 역시 <유학생활을 성공으로 이끈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나름대로 정의, 아니 실은 정의랄 것을 거치지도 않고 날것 그대로 책상맡에 놓고 살기 시작했다. 유학 후 적응을 못 해 돌아오면 <리터니 (retournee)>, 그러고도 적응을 못해 다시 출국하면 <역-리터니>라고 부른다는데 그 따위의 이름으로 불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가 특히 미국에서 맞닥뜨린 한국 유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이란 게 재밌는 것이었다.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한인 학생들은 여러 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가장 크게 유학생과 교포로 나뉘고, 유학생은 또 조기유학생과 학부유학생으로 다시 나뉜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들 대부분의 정체성을 지배한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에는 제법 큰 강이 있다. 흔히 유학생들은 교포들을 겉만 노랗고 기품이 없는 바나나라고 깔보고 2세들은 유학생들을 배타적이고 사치스러운 집단으로 여긴다. 유학생들은 쉽게 진입하기 어려운 현지인들(심지어는 유학생들은 현지 학생들을 <외국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의 사회에 맞서, 사실은 모두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한국식 대학문화>를 나름대로 짜기 위한 작업에 돌입한다. 한인 유학생들의 유대는 이미 한국에서는 스펙 경쟁에 용해되어 별반 상관없는 얘기가 돼 버린 90년대식 선후배 문화의 유령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많은 이들이 「남자 셋 여자 셋」에서 본 게 아닌가 싶은 그 언젠가의 캠퍼스를 엄한 곳에서 재건하기 위해 오늘도 애쓰고 있다. 유학생 한인회와 동문회는 그런 유대를 학교 밖까지 잇기 위해 수고를 마지않고, 신입생들을 서울에서 미리 모아 환영하기도 한다.

우리들은 그런 풍경에 다양한 방식으로 동화되기도, 겉돌기도, 적극적으로 저항, 외면하기도 했다. 한동안 우리 중 누구는 도서관에서 전화를 받기 위해 바쁘게 밖으로 뛰어나가는 한인회장으로, 누구는 도서관에 살면서 학장에게 특별히 허가를 받아 수십 시수를 수강하는 동양인 <토큰 학생>으로, 누구는 1달러짜리 피자만 먹으며 러시아 횡단 여행 경비를 모으는 청년으로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모두가 각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씻을 수 없는 공통점은 아직도 모두가 장래에 대해 어마어마한 진정성을 간직하고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신기하게도 우리의 얼굴에서 갓 분만한 듯 환하고 건강한, 냉소를 모르는 밝은 빛을 본다고 말해올 때 비로소 깨달은 점이었다. 교포들의 백인화된 천진난만함과는 또 다른, 담배연기나 짙은 화장, 환율이나 장거리 연애 같은 것들이 가릴 수 없는 밑그림 같은 순수함과 성공을 향한 운동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나도 수긍한다. 아마 그건 어려서부터 숨쉬기처럼 익숙했던, <뭔가가 되어야 한다>, <뭐라도 달라야 한다>는 의식이 중력처럼 지속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특히 첫 졸업생들조차도 아직 사회진출이 뚜렷하지 않은 민사고 학생들은 스스로 뭔가를 개척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인정하기 싫어도 의식에 어디쯤에는 자리잡고 있다. 극단적인 소수정예라 학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위기감도 작용한다. 그간 자기최면과 주변의 압력이 손잡고 단단히 지킨 <지도자 되는 배움의 길>에의 신념만이 변함없이 불안함에 대한 백신으로 작용하며 우리가 각자의 위치와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진정성을 뽐낼 있게 해 준 것이다. 건 돈이 크면 믿을 수밖에 없다.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말을 그 어떤 비꼬는 마음도 없이, 어느 아침에라도 일어나자마자 되뇔 수 있는 그런 발사체적 청춘이 여기에 있다. <세계적 지도자가 되자>라는 목표가 <선진국 진입하자> 만큼이나 뿌옇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 뜻이 분명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고 매일 밤 이를 열심히 닦는다면 그 목표가 정확히 뭐였든간에 대충 맞게 가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그런 믿음이다. 만약 그 두둥실하지만 강력한 믿음이 제공하는 <글로벌 리더>라는 환각을 포기하고, 이어령이 가자미적 인간이라 부를지라도 미래가 아닌 현재로 돌아와 인류나 조국이 아닌 개인의 멘탈리티로 방향을 틀라치면 학부 유학에 든 2억원, 전공 책 읽느라 가지를 못했던 옆 방의 아메리칸 파티, 빛의 속도로 떨어져나간 고향 친구들에 대한 미련이 채권자처럼 달려와 멱살을 잡을 때 스스로에게 들려줄 말을 준비해 놓아야 한다.

투자가 아닌 소비로서의 유학이 가능한 최고층 자제들과 대기업 입사 정도를 목표로 뛰는 중산층 수재들 사이에 서서 1보다는 착하고, 2보다는 잘나가는 그런 지점을 짚는 것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전략이라고 할 때 앞뒤로 부딪히는 불편함과 엉덩이 붙이고 살아남기 위해 애초의 믿음을 더욱 장렬히 가동하느냐, 아니면 <거기까지 갔다 와서>라는 말을 감수하고 그것과 마주하기를 시도하느냐,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변함없는 믿음으로 초일류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속도를 높이고 있고, 누군가는 안전띠를 풀고 여느와 같은 삶으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판단을 유보하고 모범 답안이 담긴 그 다음 책을 찾고 있다. 사회가 내던지지 않은 곱상한 청춘이 비싸게 산 고생길에서 떨어뜨린 자신을 찾느라 바닥을 더듬는 동안, 수많은 후배들은 종착역은 모르지만 하여튼 무진장 멀리 간다는 버스에 똑같이 올라타기 위해 우리의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

「저번에 우리는 우리끼리 인맥으로 어떻게 대충 살면 되는 거 아니냐, 그런 말을 했더니 그 친구가 화를 내더라. 그러려고 이러고 있는 게 아니지 않냐는 식으로. 근데 사실 나도 농담이었거든. 우리 인맥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을 거란 걸 아니까……. 책 보니까 옛날에는 민사고에서 의대 갈 거라고 하면 왕따 당하고 그랬다는데.」

「그러니까 내가 잘 되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 내가 금융을 하건 법을 하건 학원을 하건 성공하면 어떻게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는 걸로 보이게 만들 수는 있겠지. 보내 놓은 사람 입장에선 그게 아름다울테고. 근데 한국은 구리니까 나가라, 그래서 나왔는데 돌아가 빚을 갚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은 뭐냐는 거지. 혹시 그냥 열심히 <강남 스타일> 패러디 만들고 투표 열심히 하는 걸로 갚을 수 있는 빚인가? 아니면 군대를 좀 빡세게?」

「일단 좀 자야겠다. 논문 디펜스 준비 때문에 이번 학기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어…….」

애국 스타의 유연한 존재감

REUTERS/Danny Moloshok/Files

싸이의 후속곡 <젠틀맨>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이를 과제하듯 시청하는 해외유학생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친구들이 어떤 질문을 할까? <마더파더젠틀맨>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까? 상상하는 동안 페이스북에는 이미 신곡에 대한 미국 친구들의 반응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한다.

<강남스타일>이 폭발하는 동안에, 외국의 많은 교민들과 유학생들이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는 「정말 그 정도냐」, 현지인들에게는 「이건 뭐 하는 음악이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그간 월드스타 운운하는 자화자찬의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사례가 많았었기에 「정말 그렇게 유명할까」라는 의심의 시선이 있었지만, 이제 <강남스타일>은 어느 쪽으로 재나 여지없는 대성공임이 분명해졌다. 한국에서 시작된 그 무엇도 이 한 곡만큼 모든 층의 대중을 폭넓게 사로잡은 적이 없었다. 미국인 가운데 남·북한을 구별할 수 있는 이보다 말춤을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추측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이런 반응을 피부로 느끼는 유학생들은 종종 싸이의 성공을 자기 일처럼 뿌듯해한다. 버지니아 주에서 공부하는 한 유학생은 「문화적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기회가 되어 자랑스럽다」는 소감을 말했다. 온라인 유학생 커뮤니티에서도 싸이가 불러온 변화를 제보하는 글이 꼬리를 문다.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넘어 주류에 진입하기란 불가능해 보이던 중, 같은 반 금발 친구들이 「강남은 어떤 곳이니」하고 먼저 물어온 순간의 감격에 대한 것이다. <투데이쇼>에서 싸이가 진행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을 때 애국심이 고취되었다는 증언도 이어진다. 이처럼 싸이의 성공에 고국을 떠나 있는 이들이 감정이입하는 방식은 애국이란 키워드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가을 뉴욕 워싱턴광장에서 <강남스타일> 플래시몹을 펼쳤던 뉴욕대 한인 학생 세 명은 올해 한국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함께 센트럴파크에서 삼일절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행사를 기획했다. 사물놀이와 거대한 비빔밥이 등장했고, 뉴욕 시 한인 고등학생들이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낭독하고 만세삼창하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들은 <강남스타일> 플래시몹에서 더 나아가 「단순히 즐기고 마는 이벤트가 아니라 한국 홍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벤트」를 열기 위해 이 행사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강남스타일>을 가히 유학생들을 애국의 길로 이끄는 일등공신이라 부를 만 하다.

그토록 만들어내려고 애썼던 <백인도 흑인도 열광하는 우리 것>이라는 신화에 실체가 생기자 많은 이들이 이를 한국 문화의 새 역사로 치켜세웠다. 마치 한국에 문화가 있는 이유가 세계를 사로잡기 위해서라는 듯한 반응이다. 주인공인 싸이는 몇 달 전 한 기업이 20·30대를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김장훈을 따돌리고 <애국 스타> 1위를 차지했다. 2007년 병역 부실 판정 당시 그가 맞았던 여론의 뭇매와 지금 그가 누리는 국민적 응원과 찬사가 애국이란 키워드의 양면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애국이란 뿌연 잣대 없이 싸이를 사랑하기란 어려운 일일까.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진 재외한인사회의 파편화된 의식 속에 조국은 각자 떠나온 지점에서 시간이 멈추어 있다. 누군가에게 한국은 아직도 변방의 소국이고, 다른 누구에게 한국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된」 더 이상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나라다. 누군가에게 애국이란 곧 나라 잃고 떠돌던 애국지사들이 몸 바치던 민족정체성 확립을 말하고, 누군가에게는 세계 곳곳의 주류사회로 진출하여 한국인의 입지를 넓히는 것을 말하며, 누군가에게는 고민 없이 싸이의 가사처럼 즐겁게 내 식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 다양한 사람들이 동시에 <강남스타일>의 기적에 감동하면서, 혼재하는 여러 세대, 여러 갈래의 애국 모델로 동시에 발탁된 애국 스타 싸이의 몹시 유연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426일 싸이는 뉴욕 트라이베카 필름 페스티벌에서 혁신상을 수상했다. 주최측은 그가 「세계 최초로 유투브 1억 뷰를 달성, 세계인을 하나로 만드는 문화현상을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싸이는 작년에 같은 상을 받은 저스틴 비버처럼 세계를 하나로 모은 스타라는 점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이유가 충분해 보인다. 싸이의 성공이 유학생들이 남몰래 겪는 조국에 대한 애매한 부채감을 대리 해소해 주고, 주류의 변두리에서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교민들에게 적잖은 위로가 되었음은 분명하지만, 애국 스타라는 무거운 명찰 없이 그저 반전있고 놀땐 노는 젠틀맨으로 무대에 설 때야말로 그는 빛을 발한다.

— 젠틀맨코리아 5월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