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스레저렇게는 김괜저의 블로그이오니 잘 읽으세요.

나는 누군가의 독촉으로 새 글을 쓴다.

블로그에 글을 잘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사실 글 세상에서 중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서다. 오해를 감수하는 데 드는 비용이 점점 늘어난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 말하려면 하나, 제정신을 점점 더 자주 차려줘야 하고 둘, 기술이 점점 늘어줘야 하며 셋, 배짱이 점점 더 늘어줘야 한다. 불행하게도 셋 다 계속 말하지 않으면 반대 방향으로 가 버린다. 그래서 헛소리라도 지속적으로 해 줘야 한다.

관념적이거나 감상적이지 않고 그냥 일어난 일, 한 생각을 쭉 써놓는, 말하자면 담임선생님한테 혼나는 일기 같은 글쓰기가 그래서 참 중요하다. 오늘 것을 한 번 해 보겠다.

오늘은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났다. 밖이 흐려서 빛이 덜 들어오는 날일수록, 한 주의 후반부일수록 더 잘 발생하는 일이다. 요즘은 꼭 샤워하고 머리를 말린 다음 아침을 먹으려고 한다. 경험상 그 순서가 가장 버리는 시간이 적고 동선도 세련되다. 아침은 통통한 새끼 조기를 구운 것과 육개장이었다.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주고받는 사람이 하나 생겼다. 봐, 일기 같은 글쓰기를 하려니까 이런 얘기도 나오잖어. 그 사람은 지난 몇 주 동안 토요일에만 만났다.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서로의 자서전을 두세 번씩 읽은 듯하다. 재미있고 갑작스럽다.

자서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 쓰는 분 중 한 분인 안은별 작가가 나를 인터뷰한 내용이 포함된 신간을 낸다. 내가 인터뷰된 이유는 그 책이 외환위기 때 유년기를 보냈던 한국인 밀레니얼 몇 명의 생애 초반부를 프로파일링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에 홍대 사무실 유리벽 회의실에 앉아 몇 시간이고 내 얘기를 했는데 내가 나를 알게 되는 그 끝없는 일에 꽤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고마운 경험이다.

연말이기도 하고, 요즘 회사에서 고객개발 쪽으로 내 무게추를 옮겨 놓은 상태이다 보니 한창 사람 만날 일이 많다. 많게는 하루에 행사 한두 개와 미팅 서너 개를 소화할 때도 있다. 나는 늘 사람과 말할 일 많은 일을 주로 해 오긴 했지만, 거기에 요즘처럼 새로 만나는 사람 비중이 높아진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마지막으로 이랬던 것은 뉴브런즈윅 에이전시 재직시 대학 상대로 영업과 아이티 서포트를 뛰면서 동시에 브루클린에서는 NY30NY로 인터뷰를 다녔던 시절인 것 같다.

최근 행사 중 가장 큰 것은 Re:Work라는 컨퍼런스였다. 일의 미래라는 느슨한 주제로 묶인 주말 양일짜리 포럼이었는데 나는 텀블벅 얘기하는 세션 하나에 더해 플랫폼 사업 실무자들의 새로운 네트워크를 제안하는 발제까지 두 꼭지로 참여하다 보니 여느 행사에 비해 깊게 함께하는 태도로 임했다. 일과 사람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관심이 많다고 날 소개했는데, 사실이기는 하지만 또 언제 보면 아무 뜻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문장이다.

내게 글을 독촉한 분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다시 실없는 문자를 하러 가야겠다. 오늘의 일기 끝.

나는 일에 의도가 있게 한다.

운좋게 성숙하는 조직에서 일하면서 전에 없었거나 체계 없이 굴러가던 일들의 기틀을 잡는 일을 번번히 맡게 되는데 할 때마다 어렵지만 즐겁다. 일을 ‘생각하며’ 할 수 있는 여유 확보, 일을 ‘하나씩’ 할 수 있는 순위 설정, 일을 ‘각 잡고’ 할 수 있는 규율 부여 같은 것에 중점을 두고 일을 다시 본다. 그리고 내게 어떤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나 ‘자격’이 부여되어 있는지보다 내가 일을 어떤 목적과 방법으로 전진시키는지 그 현실적인 효과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얼마나 잘 돌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나 스스로에게 되물을 때 쓰는 기준으로 똑같이 외부와도 투명하게 소통한다. 어려운 일이다.

천적과 한강진 샐러드집에서 주말 점심을 괜히 한 끼 같이 먹으면서 사람들 대부분이 서로와 함께 일을 벌이며 생활하는 면면이 얼마나 단순 물리적, 생리적인 원칙들에 의해 지배되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강형욱씨가 동물을 다룰 때에 얼마나 의도를 정확히 상대에게 전달하고 그 효과를 확인하는 단순한 원리를 중시하는지. 사람끼리의 사회적 관계들이라는 것도 얼마나 우리가 젠체하는 겉모습에 비해 단순한 힘과 선형성에 의해 진행되는지. 단순한 원리들을 깨닫고 그를 실제 관계에 실천하는 사람들이란 얼마나 성숙하고 귀한지.

동물뿐 아니라 기계와 인간을 비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인간이 기계다울 수 있을까 기계가 인간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의문’의 형태로 오랫동안 끌고 가면서 재밌어하는 사람들은 재미 없는 사람들이다. 재미있는 사람들은 기계답기로 마음먹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의도를 가진 행동의 비율(의도가 없는 행동과의)을 높이고 정확한 인풋과 아웃풋 프로토콜을 갖추는 일. 혼돈을 도입할 때 역시 혼돈을 정확한 의도로 정확한 양 만큼 자로 잰듯 도입하는 일. 정시에 예측을 출력하고 한 사이클 뒤 예측과 실측을 비교해 다음 사이클에 반영하는 일. 그런 사람은 좋은 기계일까? 아니, 좋은 사람이다.

나는 퇴근길 소공동에서 파니니 먹으면서 포케몬 하니까 행복하다.

즐거운 퇴근길을 만들면 쾌감이 너무 크다. 퇴근길에 친구와 연락할 때 기분 좋은 상태. 최근에 프리랜서 관련한 행사에도 참여하고, ‘직장 없는 미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의견들을 갖고 있지만, 출근과 퇴근이라는 이 단순한 의식이 주는 리듬을 대체할 모델들이 충분히 나와주고 사람들에 체화되기까지 많이 좀 헤맬 것 같다.

나는 거기가 거기임에 안도한다.

아 물론 뉴욕과 엘에이와 서울이 거기가 거기는 아니다. 하지만 제대하고 나서 뉴욕에 돌아갔던 25세 김괜저가 두 뺨에 눈물줄을 그리고 뉴욕 거리를 달렸던 것에 비하면 이번 복귀는 몹시 안정적이었다. 첫날 밤, 엘에이 야라네 거실에서 절친들과 사는 얘기 나누니 이미 몸은 멀어도 이심전심, 살면서 드는 생각 하는 말들 다 비슷하다는 것 확인하고 안도했다. 세상 정치 얘기. 일과 연애 얘기. 가족과 건강 얘기. 다 그 인생이 그 인생이다.






지난 2년간 팟캐스트를 많이 들었다. 즉흥(improv) 코미디언들이 나와 노가리 까다가 상황극 하는 그런 쇼들을 많이 들었다. Comedy Bang Bang이나 Spontaneanation 같은 쇼들. 단순히 교육받은 도시 미국인들이 마냥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듣기 시작한 것들인데 정이 들었다. 잘 만든 미국식 즉흥 코미디를 듣고 있다 보면 정말이지 두뇌회전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심지어 Off Book처럼 즉흥으로 뮤지컬을 공연하는 쇼도 있다. 물론 대강의 전형적인 코드 전개들을 갖고 좌충우돌하며 펼쳐놓는 형태지만 3~4인이 서로의 재치를 곱해 스토리를 땋아가는 솜씨가 대단하다. 나는 물론 여기서도 본업에 필요한 교훈을 챙기게 되는데 (병이다) 그건 바로 즉흥연기의 불문율인 ‘Yes and.’ 상대의 상황극은 아무리 해괴해도 일단 받는 그 정신이 쇼를 만든다. 아무리 내가 더 좋은 전개 아이디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에서 공이 저쪽에 있었으면 그 사람의 토스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 말이다.

말이 딴 데로 샜는데 나뿐 아니라 야라나 모건 등 다들 이런 팟캐스트들에 각자 빠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헐리우드는 이런 코미디의 수도이니만큼, UCB에서 Off Book 공연을 보고 Largo at the Coronet에서 Thomas MiddleditchBen Schwartz의 즉흥 쇼를 보는 것도 간단했다. 브렛은 차가 밀려서 쇼가 다 끝나고야 도착했다. 엘에이 아닌가.









나는 나성에 갔다.

작년에 상해 여행을 떠나려고 김포공항에 가서야 중국 비자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본인은 이번에는 LA–NY 여행을 떠나려고 김포공항에 가서야 무비자 입국을 위한 ESTA 신청을 안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공항 벤치에 앉아 그 자리에서 모바일로 신청하니 1시간 내로 승인이 났다. (72시간까지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나란 사람 너무 재밌고 시트콤 얼른 제작돼야 한다.

LA에는 북미에서 나와 가장 애틋한 친구 야라가 그의 연인 브렛과 함께 산다. 부쉬윅에서 나와 한 집을 썼던 야라. 내가 서울로 떠날 때쯤 LA로 떠났다. 내 학교 친구들 중에는 영화인들이 많다 보니 LA에 이들 둘 뿐 아니라 이들보다 더 일찍 이사간 케일라도 있다. 게다가 내가 오는 때에 맞춰 샌프란시스코에서 모건도 놀러와주었다. 50cm는 되는 식전빵을 그보다 더 긴 도마에 올려주는 비스트로에서 만나자 그린포인트에 있던 케일라네 집에서 저질 와인을 마시고 다같이 속썪었던 4년 전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상단 사진의 벽난로에 보시면 왼쪽 액자의 45도 얼짱 각도 강아지분이 올해 초 세상을 떠난 고 찰리 강아지분이 되겠다. 야라가 그윽한 표정으로 찰리를 안고 있는 모습을 성모의 형상으로 그린 그림도 있는데, 그건 벽난로보다 화장실에서 똥 누고 나올 때 바로 볼 수 있게끔 화장실 문앞에 걸려 있다.

남의 집에서 신세지는 걸 다들 나만큼 어려워하는지는 모르지만 난 정말 내가 어떤 꼴을 보여도 창피함이 우정을 이기지 못하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잘 못한다. 야라와 브렛은 그런 가까운 사람들이다. 나는 휴가였지만 야라와 브렛에게는 일하는 평일이었고 모건은 원격 근무중이었기 때문에 해가 떠 있는 동안 나는 LA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해 떨어지면 만나서 맛집을 찾아가고, 코미디 쇼를 보고, 술 한 잔 하고, 춤 추러 가는 식으로 지냈다. 근사한 시간이었다.

나는 아직 얻지 못한 답이 있다.

Ezra Klein이 힐러리 클린턴의 What Happened를 읽고 쓴 글을 읽었다. 클린턴이 2016년 대선 전에 미국의 천연자원 산업을 바탕으로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지만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그것을 제공할 재원이 현실적으로 마련되지 않아 공약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클라인은 이것이 클린턴의 이런 점, 즉 체제 속에서 변화를 추구하며 인기를 잃을지언정 비현실적인 약속을 남발하지 않는 점이야말라고 그의 최고 가치라고 썼다. 좌우 양쪽의 파퓰리즘 기류에 편승하지 못해 졌다고 쓰인 것을 굴복하지 않았다고 읽으며 책임감이 구시대적 가치로 여겨지는 세태를 개탄하는, 요즘 흔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다. 그리고 나도 가장 쉽게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떡일 수 있는 평범하고 리버럴한 의견인 것이다.

정치 얘기는 여기까지다. 난 요즘 내가 어떤 사람이고 리더인지, 내가 아는 리더들이 어떤 리더인지에 관한 생각으로 얼른 사고의 도메인을 변경케 된다. 왜냐면 나는 지난 두 주 가량 동안 비전과 전략을 제시한다는 새로운 일 앞에 내가 하릴없이 쪼그라들고 내 스스로의 역량을 의심하는 나날을 보내고 나오는 참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략이 주어지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을 잘하고, 전략이 없을 때 나만의 기준들에 맞게 양상을 변화시키는 그런 (딱히 기업가적이라 할 수 없는) 일은 더 잘 한다. 다만 나뿐 아니라 나를 따르는 팀과 내가 따르는 스테이크홀더가 이해하고 납득하고 신뢰할 수 있는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물론 좋은 비전과 전략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그에 관한 잡학은 해 왔기 때문에 아는 것은 많다보니,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행격차를 극심히 겪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동료들은 이런 나를 기다려주었다. 때로는 인내로 때로는 갈등으로 그들은 이렇게 갑자기 있었던 리더십이 마비된 듯한 내 모습을 낯설어했다. 컨설팅을 했던 친구는 내게 무엇을 할 지 제시하는 일이야말로 제일 쉽고 별 거 아닌 일이라고 해 주었다. 나 역시 시간을 통해, 내가 가자고 제안하는 길과 그 길 끝에 있을 훌륭한 그림을 그려내고 사람들의 목표점을 일치시키는 일과 내 공약이 나를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 것 같은 두려움에 떠는 일을 간신히 분리해낼 수 있었다.

그 일을 마무리하며 (물론 아직 몇 고비가 남았다) 생각컨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는 태도만큼 이 단계에서 걸리적거리는 일도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되었다. 엉성한 습관들로 빚어진 조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희망이나 두려움 같은 화력있는 감정이다. 그런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하는 자는 정치공학의 틈새에서 당선될지언정 사람들을 한쪽 방향으로 의도를 갖고 움직일 수 없다. 사람들은 대체로 약속의 현실성을 검증하고 싶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에 엄지 척을 해 줄 사람들을 원한다. 만약 책임있는 리더가 자신의 현실 감각을 활용해 체제 속에서 변화를 일으켜 적당한 진보를 이뤄낼 생각이라고 할 때, 그 실행력을 더 얻기 위해서 허풍을 치고 기꺼이 허풍쟁이가 되는 것, 그것은 되레 실용주의적인가? 아직 얻지 못한 답이다.

나는 삿포로-오타루에 다녀왔다.

이박 삼일 가족 여행. 식구 넷이 같은 비행기 타고 해외 여행 갔다 오는 것이 7년 만이다. 마지막 여행은 간사이였다. 그 때와 비교하면 참 많은 게 바뀌었다. 에어비앤비-구글맵-구글번역 그리고 각자 쌓인, 여행 온 자신에 대한 이해. 깔끔하고 상쾌한 주말이었다.
















나는 요즘 내 한계를 자주 만난다.

요즘 나의 한계를 자주 만난다. 거시적으로는 즐거운 일이지만 미시적으로는 불쾌하기 짝이 없을 때가 많고 하루에도 몇 번씩 자존심이 구겨진다. 다행히 내가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서 자신감이 흔들릴 때 붙잡을 수가 있다. 다만 나 스스로에게 기본적으로 약간의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약점이 건드려지면 울컥하는 빈도가 너무 높다. 울컥하면 울컥한 내 자신의 모습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에 더블 울컥을 하기도 하고 그런다. 이런 내 모습을 가장 자주 보는 Y에게 내가 이처럼 평정심을 잃었다 회복했다 하는 광경은 짜증을 유발할 법도 한데 늘 그런 파도에 휩쓸리던 것이 자기 혼자였던 상태에서 같이 하는 상태로 온 것이 좋다고 해 준다. 그야말로 나만 잘 하면 되는 상황이란 얼마나 행운이고 동시에 끔찍히도 두려운가! 변명할 곳 없는 상태를 디자인하는 것이 똑똑한 사람을 조직화하는 한 방법이라고 할 때, 나라는 상대에게 멋지게 먹혀들어가고 있다.

바람이 멈추면 속상하다

바람이 멈추면 속상하다
바람이 멈춘 것에 속상해만 할 것이 아니라
나가서 뭐라도 하고 어떤 말이라도 퍼뜨리고
사람들을 움직이고 기압을 올리고 내려서
바람을 다시 불게 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내가
부족한가 하는 마음에 속상하다
차라리 바람이 멈추어 속상하다 할 것을
그렇게 빙빙 돌아선 내가 속상하다 하는 것이
별 차이가 없는 것이 속상하다
바람이 멈추면 속상하다

나는 애써 편안하다.

모든 종류의 편안함은 인위적이다. 특정 정보를 (또는 특정 정보만 빼고) 차단하였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고, 특정 조치들을 미리 취해놓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기본적으로 불편하다. 현실은 불확실하고 불공정하며 그렇다는 사실을 많이 안다고 편안해지지 않는다. 내가 보는 세계가 복잡하다는 것을 미처 다 모를 때의 편안함과 그것을 더 알아갈 때마다 조금씩 공들여 조성한 양식으로서의 편안함은 급식을 먹고 얻는 배부름과 사냥하고 채집한 거리를 직접 피운 불에 익혀 먹고 얻는 배부름만큼 다르다.

뉴욕에는 나와 비슷한 관점과 생계-세팅을 공유하고 그런 토대 위에서 건배를 하고 춤을 추고 거리를 헤멜 친구들이 있었기에 무언의 협악에 따라 우리끼리 말초적이고 안전하고 익숙한 경험들을 배치해 편안함을 만들 수 있었다. 서울에서는 그런 친구들이 적고, 흩어져 있고, 피로한고로 비슷한 처방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그 역할을 한다. 오븐에 야채를 구워 먹는다. 에어컨을 켰다 껐다 한다. 보드게임을 한다. 친척들을 걱정한다. 사람 수를 한정하고 공간을 한정하고 할 수 있는 거리들을 한정해 얻는 가장 본능적인 편안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