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스레저렇게는 김괜저의 블로그이오니 잘 읽으세요.

나는 모습을 바꾸었다.

긴 어린이날 연휴 동안 본 블로그를 가꾸고 돌보는 작업을 했다. 대대적인 탈바꿈은 3년 전 이글루스에서 자체 워드프레스로 옮겨온 이후 처음이다. 다음과 같은 변화들이 생겼다:

  • 뭐, 모양이 많이 바뀌었다. Faraj라고 이름 붙인 세 테마인데 네비게이션 패턴에 신경을 많이 썼다. 지난 번 테마보다 더 뿌리부터 반응형으로 만들었고, 워드프레스 테마 설계하는 실력이 제법 늘어서 조금만 더 잘하면 공개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보인다.
  • 귀찮다는 이유로 미뤄온 SSL 인증을 드디어 적용해서 https로 대표 주소가 바뀌었다.
  • 별다른 의미가 없는 글갈래(카테고리) 대신 모든 글을 순서대로 빠르게 훑을 수 있는 ‘모든 글’ 메뉴를 추가했다.
  • 작년 말부터 급물살을 타고 있는 온·오프라인 한사람-살기 과정의 일환으로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링크를 쉽게 닿는 곳에 넣었다.
  • 호스팅을 업그레이드하면서 본전 생각이 나서 애드센스 광고를 다시 살렸다.
  • 4년 이상 오래된 글의 인라인 CSS까지 서포트하기 위해 새 테마를 고생시키는 것을 조금씩 덜어내기 위해 일부 호환을 중단했다. 그 결과 오래된 글은 다소 흉칙할 수 있다.
  • 방치돼 있던 캐싱과 이미지 최적화 설정 등을 손보았다. 속에서 바뀐 거야 워낙 많은데 다 얘기하긴 지루해서 이만 줄인다. 그간 클라이언트 작업으로 향상된 워드프레스 개발 관련 잡기나 직장에서 익힌 베스트 프랙티스를 적용했기에 좀 덜 부끄러운 작업이 되었다고 해 둔다.

즐겁게 쓰고 즐겁게 찍고 즐겁게 축적하자. 얼마 전 강연자로 참석했던 행사에서 <눈물의 블로그 10년>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블로그하는 것만큼 ‘쓸만한 사람으로서의 나’에 크게 기여한 습관이 없다. 글을 더하는 속도가 많이 줄었는데도 많이들 와서 읽는 것 같고 정체될 만하면 또 재미있는 일이 생기고 하니 묘한 일이다. 나무테가 이것이다.

나는 세상 피곤한 건 상관없다.

박근혜를 탄핵하라는 구호를 처음 외치러 나갔던 날에 남대문에 내려서 통제된 세종로 따라 걸어 올라갔다. 촛불을 든 사람 확성기를 든 사람 팻말을 처든 사람들이 점점 빽빽해졌다. 분명 모두들 비슷한 말을 외치고 있었고 나도 함께하러 온 것이었지만 내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좀체 들지 않았다. 그러다 시청쯤 다다라서 높다랗게 든 무지개 깃발 주위 한줌의 사람들이 보였다. 성소수자 인권 단체, 진보정당 내 성소수자 위원회, 신생 퀴어 페미니스트 유닛들. 그 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니 그제서어 목소리가 나왔다. 박근혜를 탄핵하라, 이재용을 구속하라를 대여섯 번 외치면 한두 번은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군형법상 추행죄 폐지하라 외쳤다.

이후 촛불문화제건 시위건 일단 여성들과 성소수자들이 모인 곳부터 찾아다녔다. 내가 촛불 속에서 다같이 ‘넘실거리는’ 경험에 취해 우리가 민주주의 만들었다 같은 속편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더는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탄핵은 되었지만 박근혜가 밉다고 여자 후려치는 세상은 가지 않았다. 정권교체는 되었지만 보수 기독교 무섭다고 성소수자 내던지는 정치는 바뀌지 않았다. 당선권 밖 후보들 합리적 지지하기에 역사상 가장 좋은 선거였지만 표 저당잡힌 듯 겁박하는 맹목적 팬클럽 지지는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사드 배치 대체로 찬성하고 교육개혁과 4차산업혁명이 국가적 의제여야 한다는 데 동의하며, 국가주도 일자리창출은 한계가 뚜렷하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정의당이라는 집단을 기본적으로 크게 신뢰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 기간동안 심상정이 아닌 후보에게 표를 줄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대권주자로서 성소수자 인권포럼에서 축사하고, 게이들이 합동 제출한 성소수자 대선주자 요구사항에 차별금지법과 군형법상 추행죄 정확히 들어 답변하고, 동성애 반대한다는 토론에서 1분 할애해 기본을 확인시킨 후보가 한 명이라도 있었고 그 모든 것은 기록되고 축적될 것이라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다.

정치가는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고 그의 행보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시민도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선택을 하면 될 일. 내 인권 찾아 표를 움직이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피곤하지만 그야 본디 세상이 피곤하기 때문이니 개의치 않는다.

나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일등후보에 웃는다.

나는 지난 대선 때, 초반에는 망설였지만 선거 임박해서는 문재인 펀드에 돈을 넣을 정도로 정권교체 위한 비판적 지지에 열려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결과를 마주하면서 그런 태도를 거두기로 결심했고, 최근 여성 인권과 성소수자의 존재가 이슈화되면서 모든 순간에서, 또 끝까지 싸우는 것밖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점을 동네방네 외치고 다니는 자가 되었다. 박원순 시장을 향한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호소가 하나의 계기였고, 최근에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하면서도 성소수자 차별 철폐는 ‘나중에’ 말하자는 문재인 후보가 또 하나의 계기였다. 반면, 나와 국가관도 경제관도 조금씩 다르고 정치공학에 대한 태도도 공감갈 일이 별로 없었던 정의당의 대표 심상정 후보는 최근 지속적으로 성소수자 인권 관련해 유일하게 목소리를 내는 역할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3월에 열린 성소수자 인권포럼에서 막 대권 행보를 시작한 그의 모습을 보고 신뢰가 생겼다.

조금 전, 인권변호사 출신이자 대권 선두주자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나중에 듣겠다’에서 한 발짝도 아니고 수십 보 후퇴하여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토론 중에 잘라 말했다. 그리고 심상정 후보는 곧장 추가 시간을 사용해 가며 이 발언을 비판하고 성소수자 인권 보호와 차별금지법 제정에 뜻을 밝혔다. 성소수자 인권은 보호하면 잃을 게 많아서 망설이는 것도 모자라 가장 공개적인 토론 현장에서 ‘반대한다’는 얼토당토한 언어까지 쭉 미끄러져버리는 개탄스러운 수준의 리더에게 맡길 수 없는 문제다. 문재인 후보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 발언에 대해 두고두고 책임져야 할 것이다.

나는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봄이 되면 생각나는 죽은 사람이 있다. 바쁜 학생이었던 나를 가르친 그 많은 선생님들 가운데 가장 선생님이 아니었던 사람. 그는 열 일곱의 나와 우리 반 아이들에게 한 학기 동안 시를 가르쳤다. 가르쳤다기보다, 시라는 것이 있으니 한 번 그게 무엇일지 자기가 줄 수 있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우리 나름의 마음을 뒤져서 찾아보라고 권한 것에 가깝다. 허연 교실에서 시를 쓸 순 없다며, 눈이 갓 녹은 초봄부터 해먹이 걸린 풀밭 소나무 그늘로 우리를 내보냈다.

우리는 뭔가에 홀린 듯 매일같이 시를 쏟아냈다. 쓸 게 없다고 우물쭈물하는 친구 하나 없었다. 그 전까지 우리는 칠십대 영문학 선생님이 강당에서 한 시간 내리 읊어주는 세르반테스 강의를 들으며 조는 데 익숙해 있었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턱수염을 기른 이 젊은 남자는 매년 여름마다 음악가 친구들과 함께 캄보디아의 밤바다에서 맥주를 마시고 헤엄치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그는 우리와 한 마음이 되어 여름방학을 기다리면서, 우리를 두렵게 하고 답답하게 하고 꼼짝 못하게 하는 생각들을 녹여 각자의 공책에 흐르게 해 주었다.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열 여덟의 나와 우리 반 아이들이 그가 늘 가던 캄보디아의 그 해변에서 맥주를 마시고 헤엄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이미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나는 천안과 군산에 갔었다.

벌써 몇 주 된 일이 됐다. 목요일에 예비군이 잡혔길래, 금요일에 월차를 써서 긴 주말동안 천안과 군산에 머물렀다. 낯선 사람 두 명을 만나 친해진 것, 간만에 사진을 꽤 찍은 것은 소득. 시외버스와 모텔 신세로 등 근육이 제대로 화가 난 것은 손실. 그러나 소득을 준 부분과 손실을 준 부분을 칼로 자르듯 자를 수는 없다. 그냥 천안과 군산 여행이었다.

천안은 저녁에 출발해도 되는 거리이기 때문에 세종시와 고민하다 택하게 됐다. 천안까지 1호선으로 이동. 천안에서 트위터 친분 하나를 현실 전환했다. 주택을 개조해 커피와 술을 팔고 평일인데 디제이도 하는 곳에서 한 잔 했다. 성정동에서 묵고, 문성동과 신안동을 걸어다녔다. 다음날 군산으로 이동하면서 허니버터 캐슈넛과 대만산 바나나우유 한 잔을 했다. 천안은 가 본 적이 있었지만 군산은 처음이었다.

날씨가 막 풀린 직후였기 때문에, 걷기 애매하다 싶으면 걸었다. 군산에서 잔 모텔은 벽에 칸예 가사가 적혀 있었다. 굳이 택시를 타고 채만식 기념관까지 간 뒤, 거기서 금강 하류를 따라 도심으로 걸어 내려왔다. 웃긴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웃긴 부분에는 큰 소리로 웃고, 노래는 따라 부르면서 털털 걸었다. 서울에서는 강가를 걷는 걸 많이 안 했던 것 같다. 다른 도시에 살 때엔 일주일에 많으면 두세 번씩 강가 걷기 타임이 있었다. 그러기 편한 도시에 살았던 것도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서도 다른 리듬으로 생활했더라면 얼마든지 한강 둔치를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냥 서울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렇게 써선 안 될 것처럼 되어 있을 뿐이다.




군산 시내는 큰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서 그걸 따라 몇 바퀴 변주를 주며 도는 식으로 구경했다. 관광객들이 가는 곳이 정확히 몇 군데로 딱 정해져 있어서 전반적으로 몹시 한산했다. 낮에는 스테끼동을 잘 하는 집에서 점심을 먹고, 늦은 밤에는 우유를 손에 들고 단팥빵을 문 채 새만금 벽화가 그려진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9년 전 나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 알게 되었다. 돈을 모으면서 다음에 노트북을 살지 사진기를 살지 갈등하던 그 느낌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다음에 뭐가 오는지에 대한 답까지는 아직 없지만.



So that it may seem pleasing to you

So that it may seem pleasing to you
My thoughts are filtered for little bits of sand
And scattered over a wide area
Where men and women of the mind pick
And glean and organize into a neat array
That hopefully makes me look like a crazy person
Whose randomest musings and perverse word associations
Are insta ready

So that it may be palatable to you
The story of my life is kneaded and stretched and looped
Over and over again on a stainless pole
Until the whole thing becomes a swirly roll of toffee candy
You know, the kind that’s pretty because it was beaten and contorted until it was
But actually started out pretty ugly
If you ask me

So that it all seems self-deprecating to you
My process is edited and the names redacted
The PR team is divided
The electorate misguided
I steal criticism meant for my neighbors
And play it on my private radio
That has been by any standard pretty public
So is now clear to me

나는 본명조로 바꿨다.

Adobe Type에서 출시한 본명조(Source Han Serif) 첫인상이 좋아서 곧장 블로그에 적용해 보았다. (로마자와 문장부호는 이전에 쓰던 Merriweather에서 Lora로 갈아탔다.)

한국 지역용으로 서브셋된 서체의 7개 weight 가운데 Regular와 Bold만 추려서, 로마자와 한글, 필수약물, Latin Supplement 1까지만 포함한 2986자만 서브셋한 다음 웹폰트로 변환을 거쳤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스포카 한 산스 경량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읽어보시면 좋겠다.

서체 자체에 대한 리뷰를 할 생각은 없다. 나로서는 세리프가 뭉툭하고 초성의 면적이 넓어 면을 가득 채우는 한글 디자인 첫인상이 내가 찾던 느낌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한글 위주로 잘라 쓰지만,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물론 전작 본고딕처럼 동아시아권에서 두루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한글은 두꺼워질수록 가로세로 대비가 영어는 물론이고 중국어·일어 문자에 비해 확연히 적게 두었는데, 그런 류의 결정들에 대해 더 자세히 과정을 다룬 글 같은 게 나왔으면 좋겠다.

이로써 지난 3년간 사용한 나눔명조와 작별하게 되는 것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얼마간 세부 세팅을 조정해가며 사용하고 나서 결정할 생각이다.

나는 떠나는 걸 잘한다.

대통령이 무사히 파면된 어제, 금요일. 천적과 J의 집들이가 7시였는데 캘린더에 8시로 잘못 적어놓았다. 선물로 공구함을 준비했는데 미처 공구함에 공구들을 넣지도 못한 채로 황급히 달려갔다. 둘의 집은 천장이 높고 차분한 하늘색 벽지가 예쁜 공간이었다. J가 준비한 보쌈과 골뱅이 소면을 포도주와 먹으면서 삼갯까지 넷이 다음과 같은 주제들로 떠들고 놀았다: 장기 이식, 통계학, 자연사박물관, 범죄수사극, 지나온 시공간에 대한 환상이나 미련 처리.

그 중에 ‘지나온 시공간에 대한 환상이나 미련 처리’ 주제에 내가 얹은 얘기는 그보다 이틀 전에 동료 C와 점심을 먹다가 나 자신에 대해 사소하게 정리하게 된 내용이었다. 나는 머물렀던 공간에 정을 많이 주는 편이다. 거쳐온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전부 떠난 뒤에 다시 돌아가보았다. 심지어 군부대도 전역 후 두 번이나 방문했다. 기본적으로 1년 이상 머문 공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리적인 종결(closure)을 내리기 위한 작업을 한다. 프랑스에서 한 학기를 보냈을 때에 특히 이런 고민이 컸다. 나는 부인할래도 프랑스에 대한 환상을 갖고 살아온 평범한 인문-낭만 구독자이고 그것은 직접 살아보지 않고는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아 오긴 왔는데, 미래에 대한 큰 걱정 없는 친구들과 무더기로 어울리며 성적, 사상적으로 말랑말랑해지는 그 생활이 너무 좋은 나머지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오히려 파리라는 장소에 대한 더 큰 동경이 남을 것 같다는 고민이었다. 나는 파리에게 마음 속 적절한 작은 방을 구해 주기 위해 여름학기를 추가로 신청해 3개월을 더 보내기로 했다. 서로 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친해진 친구들이 뉴욕으로 돌아가고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생기자, 그 친구들과의 추억과 파리라는 도시를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조금 다른 과정이긴 했지만 살 곳으로 뉴욕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던 심경을 가다듬는 데에는 취업 트레이닝 비자 기간이 끝나고 나서 두 차례 관광비자로 돌아가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해 본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난 시절에 대해 내가 놓고 싶지 않은 것이 내게 주어진 기회였는지, 함께한 사람이었는지, 특정한 시대적 흐름이였는지, 아니면 정말로 그 장소가 주는 효과였는지를 분간하기 위해서는 다소 적극적인 종결 처리 과정이 필요하다.

청와대에서 나오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조언이 가능할 것 같다.

나는 일과 사람의 관계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나는 본능적으로 일과 사람이 맺는 관계, 즉 사람의 생각과 삶에 일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또는 해야만 하는지에 관한 주제에 끌린다는 점을 자각했다. 재작년까지 Collabodate 또는 Skillcard라는 이름으로 뉴욕에서 만들어보려 했던 시도는 창의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함양할 기회만 있다면 우리 모두일 것이다)들이 자신의 능력과 관심사를 주제로 사람을 만나고 협업하는 기회를 드라마틱하게 늘려주는 서비스를 만든다면, 일이 단순한 직장이 아닌 관심과 의미의 생성으로 재설정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에 기반한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텀블벅에서 일하는 것이 의미있다고 느끼는 이유 역시 자본이나 생산도구를 독점하는 기업이나 조직에 몸담지 않고도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둘 다 일을 의미있는 것, 즐거운 것,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자유의 표현으로 기능하게 하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꿈으로부터 힘을 얻는 사업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긴다는 것이 바로 내가 내 일에 대해 갖는 생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얼마 전, 좋은 첫인상을 받았던 사람이 자신의 일로부터 그 어떤 의미도 재미도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철저하게 수동적일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을 때 내 마음이 강을 건너버리는 것을 알아챘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일에서 흔히 말하는 ‘자아 실천’ 같은 것을 찾는다는 것이 사치로 느껴지는 현실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과 취향을 발현시키는 데에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구상이 없는 사람과는 나눌 수 있는 공감의 깊이가 무척 얕다는 것을 매번 확인한다.

일과 사람의 관계는 우리가 애써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대도 우리 세대 안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격변할 것이 틀림없다. 직장은 사라지거나 파편화될 것이고, 프리랜서는 고용형태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고, ‘사이드 프로젝트’는 주업이 될 것이고, 가장 오랜 기간의 트레이닝이 필요한 ‘보장된’ 직무부터 자동화될 것이다.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 의미없는 일은 당연히 아니다. 저항을 통해 큰 흐름을 돌릴 수는 없어도, 흐름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를 바꿔놓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한편 저항 대신 그 변화의 방향과 톤을 제어하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한 일을 내가 ‘맡아볼’ 수 있을 거라는 자세가 내가 생각해도 퍽 대담하긴 하지만, 누군가는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서운한 기분도 뿌듯한 기분도 아니다.

추운 날이었는데 종일 걸어다녔다. 오른발 한쪽이 살짝 안 좋은데 그러니 더욱 걷고 싶었다. 옛날에 살던 아파트 단지에 가 보았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이 험상궂은지를 보았다. 육교를 건너다 말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오후 네시쯤 비스듬한 빛을 받는 것들을 사진 찍었다. 내 사진을 보면 주말을 알 수 있는데 보통 힌트가 오후 햇살이다.

교회에서 나온 젊은 사람들이 뻣뻣한 분홍색이나 베이지색 울 코트를 입고 반대편 카페로 무리지어 들어갔다. 나는 내 두꺼운 패딩 점퍼 속에 숨어서 걷던 중이었는데,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기능적인 옷이다. 두껍고 무겁고 비싼, 양손을 펭귄처럼 옆구리에 붙일 수 있게 45도 주머니가 가슴께에 달린 패딩이다. 이 옷을 입으면 주인공으로서의 내가 어딘가 다른 곳에 잠시 가 있는 동안, 조용히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기능으로서의 내가 열심히 곳곳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서운한 기분도 아니고 뿌듯한 기분도 아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택시 타기에 관한 글을 썼다. 그 글은 내가 옛날 랩탑에서 마지막으로 쓴 글이다. 퇴근길 카페 꼼마 이층에 앉아 퇴고하다가 시스템이 툭툭 나가더니 이튿날 죽었다. <뒤로> 작업도 그 때문에 마감을 못 맞췄다. 장비에 문제가 생길 때 내 컨디션이 얼마나 추락하는지 보면서 나에 대해 또 한 가지 배웠다. 하긴 열 살 때쯤, 소리지르는 법을 아는 줄도 분명하지 않았던 나란 아이가 플로피 디스크 열 개 정도 갈아 끼워야 설치되는 게임이 마음대로 안 깔리자 눈이 뒤집히고 난동을 부렸다고 그랬다. 요즘은 그냥 문제가 발생한 장소로부터 멀리 떠나서 평소에 안 하던 짓을 작게 하나쯤 하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