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들이 어렵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계신 묘지에는 관리인을 늘 쫓아다니는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흑묘 백묘 하나씩 관리인의 다리 사이를 8자로 감아 엥기며 오는 모습을 보면 일종의 위성 같기도 하다. 관리인은 그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남자이지만 묘지 관리인이라는 역할에 고양이 두 마리를 늘 데리고 다니는 점 때문에 두 번밖에 본 적 없는데도 마치 만화 캐릭터처럼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알고 지냈던 고양이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일단은 뉴욕에서 나와 두 번이나 룸메이트를 했던 엔젤라의 반려묘 Ziggy가 있다. 하얗고 통통한 Ziggy는 적당히 고고하고 적당히 게으른 전형적인 집고양이였다. 앤젤라가 워낙 잘 챙겨서 내가 도울 일은 거의 없었지만 간혹 밥을 주곤 해서인지 한 달에 한 번 정도 빼꼼 열린 방문을 비집고 들어와 내 침대맡에 앉아 작업하는 나를 뚫어지게 보곤 했다. 우리는 Ziggy를 집 밖으로 내보낸 적이 거의 없었는데, 어느 날 벼룩이 붙어 와 전원 패닉하게 만든 적도 있다. 알고 보니 아파트 기반에 난 틈새로 들락날락하는 깡마르고 새카만 고양이와 친해져 옮은 것이었다. 그 둘의 결말이 어땠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집은 고양이도 사람도 살기에는 좀 부실한 데가 많은 집이어서 매일매일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 투성이었다.

이와 반대로 아이 두셋을 키워도 벌써 완벽히 해낼 것 같은 제시카와 카일은 우리로부터 5분 거리에 있는 레일로드식 아파트에서 Lox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키웠다. 사교적인 이들 내외를 닮아, 땡스기빙 팟럭 같은 것을 하면 소파에 앉은 손님들 목 뒤로, 무릎 사이로 헤집고 다니며 애정을 수집해 가곤 했다. 늘 장난기 많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나도 고양이와 산다면 이런 고양이와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요즘 회사 동료 중 두 명이나 아기 길고양이들을 입양해 가끔 사무실에도 데리고 오고 하다 보니 고양이와 함께 사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좀 더 자주 들기는 했다. 하지만 셋 셀 시간 정도만 생각하면 금방 사그라든다. 난 고양이들을 연예인 비슷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정도 거리에서 나와는 다른 그들의 모습과 능력을 관찰하고 가끔 그들에 관한 가십을 소비하는 정도로 지금처럼 잘 지내고 싶다. 직접 만나진 않고 인스타 좋아요만 누르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있는 고만고만한 요즘 인간관계와도 다를 게 별로 없긴 하다. 연애를 안(못) 하고 고양이를 떼로 키우는 것이 클리셰라고는 하지만 난 똑같은 문턱 때문에 둘 다 어렵다.

나는 돈 돈 한다.

어쩐지 주변에 돈 얘기 잘 안 하는 사람으로 인식돼 왔던 것 같다. 공부도 돈 버는 일과는 별 상관 없는 과목들로만 하기도 했고, 딱히 어떤 길로 가야 돈을 더 버는지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온 느낌이다. 실제 내 마음 속에도 돈이 차지하는 지분이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마주친 동창이 만나자마자 재테크 얘기를 하는 걸 보고 왜 저러나 싶어하기도 했고, 누군가 자기는 빨리 불로소득으로만 살아가고 싶다고 말한 걸 두고 두고 속으로 쯧쯧거리기도 했다. 당연히 자라온 환경과 집안 분위기 탓인데 친할아버지로부터 직계로 전해 오는 ‘돈보다 지식과 관직’이라는 인식이 큰 데다 친가건 외가건 사업가나 장사꾼 기질이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유복하다고까지 하기는 어려워도 평탄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내 삶이 돈이란 것의 지배를 받고 있구나 하는 깊은 각인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 같다. 여기에 더해 학창 시절 자본주의 하에 노동을 수단화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들다 보니 노동의 결실이 아닌 소득이나 부에 대한 선입견이 컸다.

돈은 참 개인적인 문제다. 돈과 몸. 이 두 가지가 나의 ‘가장 개인적인 영역’의 핵심 주제어다.

그런 내가 요즘 들어 부쩍 친한 친구만 만나면 스스럼없이 돈 얘기를 한다. 작년 말쯤부터 내 개인 재무에 대한 통제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단순히 내 생활비 계좌 잔고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어떻게 모으고 불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계획을 갖고 생활하게 된 것은 이 때부터다. 이런 습관의 형성 시기가 나보다 훨씬 빠른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은 보통 그런 습관이 조기에 필요해진 이유가 있더라. 나는 약간 늦었다는 생각으로 의식적으로 그런 습관을 만들려 노력했다. 그리고 올해 중반부터는 부동산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식 부동산 투자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상황은 아니지만 서울살이를 시작한 이후 주거와 결부지어 관심이 안 생길 수 없는 영역이었다. 부동산 책 대여섯 권을 읽고, 부동산 주제들에 관련해 시각이 완전히 다른 유튜브 채널들을 비교해 본다. 증권사에 일하는 친구가 나와 한두 달에 한번씩 만나 저녁을 먹을 때마다 너 진짜 돈에 관심이 있긴 있구나? 하고 놀라곤 했다. 하긴 예전에는 기업에 다니는 친구가 내게 밥을 사 주면서 넌 돈보다는 재밌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며 신기해한 적도 있었지.

사실 여전히 돈을 ‘악착같이’ 모으고 ‘깨알같이’ 불려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샘솟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노동과 소득을 분리해야겠다는 마음은 생긴 상태다. 작은 자본도 자본이고 큰 급여도 결국 급여인데, 사실 자유로운 삶—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고 싶은 곳에 사는—을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할 작업이 이러한 전환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한 번도 소비적인 적이 없었고 모두 생산활동이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만이 나는 재미있었으므로) 생산이라면 반드시 급여를 받는 노동일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급여라는 방식이 아닌 생산에 더 관심이 가는 것 같다. 물론 이런 변화는 현실적으로 하루아침에 이루는 것이 아니라 몇 년, 몇십 년에 걸쳐 일어날 지도 모른다. 여하튼, 요즘은 그런 쪽으로 돈이라는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네 번째 부산 여행을 했다.

부산 참 여러 번 왔다. 올 초에 출장도 왔었고 그 밖에 잠깐씩 들른 적도 있었지만 이틀 이상 여행한 것만 해도 이번이 네 번째인 것 같다. 여행은 가고는 싶고 국내에는 머물고 싶고 도시에도 있고 싶고 하는 어정쩡한 마음일 때 가는 곳이다 보니 복잡한 마음을 질질 끌고 갔던 기억이 유독 많은 곳이다.

가장 처음에 갔던 게 8년 전. 절친 무가식과 왔었다. 군대 휴가였는지 몸은 마르고 머리가 빡빡이였다. 적잖이 허접한, 해운대 외국인 관광객들이 들락날락하는 바에서 칵테일 마시며 나름 야한 얘기로 노가리 까던 기억, 컨테이너 대충 쌓아올려 만든 부경대 부근의 편집숍에서 〈인벤토리〉를 보고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게 8년 전 벚꽃 피는 계절에 찍었던 사진이다.

두 번째가 6년 전. 혼자 와서 당시 새로 생긴 부산역 토요코인에서 잤다. 부산항이 살짝 보였다. 양껏 돌아다녔다. 책방 골목 같은 곳들… 이 때 나 혼자 가만히 낯선 곳에서 밤을 보낸다는 느낌이 참 좋아서 비싼 빵과 치즈, 햄, 와인을 사서 방에서 영화를 보며 먹었다. 그러면서도 참 내가 웃기다고 생각했다. 만날 사람도 없었고, 별 볼 일 없는 짓들로 하루를 채우는 것이 즐거웠다. 그 때 밤에 광안리에서 찍었던 사진은 이거다.

세 번째는 해리랑 왔다. 그게 벌써 4년 전이구나. 처음 서로를 알게 돼 어쩔 수 없이 좋았던 그 때. 난 그에게 맛있는 걸 먹이려고 저번처럼 부산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에서 바게트를 사서 비싼 치즈에 서양배와 프로슈토를 얹어서 먹었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해리는 그런 걸 안 좋아하지. 지금 다시 같이 간다면 밀면이랑 커리 우동 같은 것들을 먹일 것 같다. 지금 너무 친한 친구가 된 해리지만 그 당시 사진을 보면 연애하던 때의 걷잡을 수 없는 벅찬 감정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해가 질 때까지 하염없이 둘이 걷다가 찍은 사진 하나 골랐다. 이 때도 꽃 피는 계절이었다.

이번에는 다시 혼자고, 겨울이다. 앱을 계속 켜 놓고 이 사람 저 사람과 실실거렸지만 아무도 만나지는 않았다. 쉴 작정이었기에 비교적 조용하다는 송정 바다가 그대로 들어오는 숙소를 잘 잡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 파도가 치고 있는 기분. 생각해 보니 그런 기분을 처음 느꼈던 것은 열 살 때 YMCA에서 국제 교류 캠핑 같은 프로그램 일환으로 일본으로 캠핑을 갔었을 때였다. 분명히 텅 빈 공터같은 곳에서 밤에 캠프파이어를 하고 처음 보는 일본 아이들과 뒤섞여 놀았는데, 아침이 되어 눈을 떠 보니 그게 바다처럼 넓은 호수가였다는 것을 깨닫고 마치 절벽에서 눈 가리고 춤을 췄던 것처럼 서늘한 안도감을 느꼈었던 기억이다.

아무래도 이제는 허송세월을 하더라도 머리가 텅 빈 채 걸어다니는 것보다는 몸과 마음을 제대로 쉴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물론 성격상 그러진 못했지만. 하루에 적어도 삼십 분 정도는 호텔 탁자에 가만히 앉아서 정신을 가만히 돌봤던 것 같다. 그 삼십 분을 내려고 두 시간짜리 케이티엑스를 타고 내려오고 한 시간 더 들어가야 하는 송정 같은 곳에 묵는다. 서울로 올라갈 때엔 KTX 사고로 기차 안에서 다섯 시간을 보냈다는 것도 적어 둔다. 이번에 찍은 바다 사진들이다.






나는 이제 한국어 전자책도 사 봤다.

드디어 앱스토어를 한국으로 옮겼다. 3년 전 처음 서울 돌아왔을 때에만 해도 자주 쓰는 앱 중에 한국 앱스토어에 없거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간 적응을 하기도 했고 앱스토어 국가간 경계도 그 동안 옅어진 덕분에 앱 사용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 일단 다행이다.

문제는 북스토어인데, 다행히 지금까지 사 놓았던 책들은 문제 없이 읽을 수 있지만 미국 스토어에서 새로운 책을 살 수는 없다. 한국 애플 북스토어는 있으나마나한 곳이어서 지금 읽고 있는 책들을 다 읽으면 애플 북스 앱도 당분간 쓸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킨들을 써야 하는데 아이폰용 킨들이라는 것이 또 참… 일단 애플과의 오랜 수수료 냉전 때문에 킨들에서 책을 바로 살 수 없다. 심지어 iOS용 아마존 앱에서도 전자책은 살 수 없다. 사려면 브라우저에서 아마존을 켜야 한다. 독서 경험에도 부족함이 많다. 세련되고 잘 읽히는 폰트가 없으며 가장 치명적인 것은 페이지 넘김 없이 스크롤 읽기가 안 된다. 책 읽다가 울게 된다. 운동처럼 독서도 환경이 모자라면 쉽게 집어던지는 연약한 정신이기 때문에 완벽했으면 좋겠는데 아쉽다.

그나저나 한국어 책은 아직 전자책으로 사 본 적이 없다. 전자책은 주로 실용서나 내가 이미 잘 아는 작가의 책을 가볍게 읽을 때 쓰는 편인데, 둘 다 대부분 영미권 책들이어서 좀체 한국어 전자책을 읽어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다 보니까 좀 너무했던 것 같다. 한국어권 전자출판이라는 주제에는 관심이 있는데 정작 책은 하나도 안 샀다니! 그래서 마침 관심이 있었던 이다혜 작가의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를 리디북스에서 사 봤다. 이따 퇴근길에 읽어야지.

나는 사실상 헤드윅이 만들었다.

헤드윅을 만든 존 캐머론 미첼이 얼마 전 한국에서 콘서트를 했다. 주변의 많은 뮤지컬 팬들과 퀴어들이 간다고 신난 것을 보았다. 호들갑 방지 모드로 인해 짐짓 가만히 있었는데 나도 무척 반가웠다. 이미 너무 잘 알아서 툭 치면 나오는 레파토리라 굳이 보러 가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다들 헤드윅 얘기를 하는 것 같을 때마다 노래들을 쫙 듣곤 한다.

인생이 헤드윅으로 한 번 바뀐 것은 고3때였다. 일반적인 입시와는 거리가 있어 공부에 매어 있는 상태는 아니라 애매한 자유 시간은 주어진 상태였고 사춘기 끝무렵에 새로 발견한 각자의 정체성이 너무 소중해 여기저기 오줌 누듯 취향의 영역 표시를 하고 다니던 때였다. 물론 숨겨야 할 정체성이 거기 포함돼 있던 내게 그런 점을 정확히 자극하는 헤드윅이라는 영화 DVD는 큰 기폭제였다. 방 안에서 몰래 기숙사 일괄 소등 후에 노트북으로 그 영화를 몇 번이고 보고 노래를 외웠다. 헤드윅이란 인물만큼이나 그의 상대인 토미 노시스, 나아가 이걸 다 만들었다는 미첼에 대해 복합적으로 이입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 헤드윅에 빠진, 하나같이 평소에 자기 취향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성격을 공유하는 친구 몇몇과 서로를 알아채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존 캐머론 미첼이 한국에서 최초의 해외 콘서트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예매를 했을 뿐만 아니라 잠실 공연장에 가기 전 신천역 노래방에 들러 등록된 서너 곡의 헤드윅 넘버를 열창하기까지 했다. 그의 공연은 화려하고 파워 넘치고 모든 것이 열여덟살 나를 위한 무대처럼 느껴졌다. 스탠딩석 반대쪽 저 멀리에서 서먹서먹한 사촌 형의 실루엣을 얼핏 보고, 아! 했던 순간이 선명하다. 블로그에도 그날의 기록이 있다.

이후 뉴욕으로 대학을 가고 헤드윅보다 더한 각성과 센 자극과 깊은 이념을 제공하는 갖가지 텍스트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것에 열광했던 것이 오래 전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게이로 살기 시작했지만 되레 너무 뻔하게 게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기 위한 발버둥도 조금씩 시작됐다. 뮤지컬에 관한 얘기들 사이에도 렌트나 헤드윅처럼 윗 세대(미국에서는)의 감수성으로 지어진 콘텐츠는 아카이브해도 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헤드윅은 렌트에 비해서는 특유의 유머와 자아도취 덕분에 오히려 시대적 변화 앞에 유연하게 윙크하거나 메인스트림 앞에서도 애교를 부릴 수 있는 곳에 위치하게 됐다. 닐 패트릭 해리스 주연의 브로드웨이 프로덕션 포스터가 앤드류 레놀즈로 교체될 즈음에 존 캐머론 미첼을 찍을 사진사로 일할 수 있나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그렇게 4년 전 우연한 기회로 한국에서 날아온 뮤지컬 잡지 기자님과 통역을 맡은 친한 형과 함께 웨스트 빌리지에 있는 존 캐머론 미첼의 집으로 갔다. 거기서 한국 팬들을 각별하게 기억하는 그의 웃음과 집을 가득 채운 소품들에 집중해 바쁘게 렌즈를 바꿔가며 셔터를 눌러댔다. 눈깜짝할 새에 인터뷰가 끝났고 별도의 인물 사진을 위한 세팅도 충분한 협의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가능하면 잡지의 커버로도 쓸만한 표지 사진을 찍어야 하는 미션만 남아있었다. 너무나 운좋게 그의 아파트 문 앞에서 사선으로 들어오는 창문 빛을 사용해 딱 한 장 그런 사진을 건질 수 있었던 점은 당시 일기에도 기록돼 있다.

그 날은 나에게 일종의 헤드윅 졸업식, 그리고 같은 선상에서 뒤늦은 청소년기 졸업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나라는 개인의 본격 형성 시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당시만 해도 상당히 얼터너티브한 무언가로 인식됐던 헤드윅이 어느덧 브로드웨이에 전 연령 관람가로 내걸리고, 처음에 무거운 삼성노트북 스크린으로, 두 번째는 잠실 무대에서 봤던 미첼을 반쯤 고장난 내 카메라로 되는대로 찍어대기까지 세상은 얼마나 변했고 나는 또 얼마나 변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원래 글을 쓰려고 했던 건 워너원의 신곡이 헤드윅 작곡가 스티븐 트래스크의 <오리진 오브 러브>와 헤드윅 아트워크를 차용한 문제에 대해 생각을 쓰려 했던 것인데, 생각보다 그에 대한 내 보탤 만한 의견보다는 그저 나를 만든 콘텐츠에 관한 추억거리만 많다는 점을 깨닫게 돼서 그런 얘기만 적고 만다.

나는 어렵게 생각하는 것을 중단한다.

어렵게 생각하는 병은 고치기 참 어렵다. 고치려고 드는 생각이 다 어렵기 때문이다.

어제 일터에서 내 이런 점에 대해 답답함을 표출하고 나서 집에 왔는데 밤에 잠이 안 오는 거다. 내가 밤에 잠이 안 오는 일은 일 년에 두세 번 밖에 없는 일이다. 어찌저찌 아침이 되어 머리를 비우고 싶어서 아침을 먹으면서 Bojack Horseman 에피소드를 하나 봤다. 망가진 배우 보잭이 어려서부터 원하던 인생 배역(Secretariat)을 맡아 촬영하는 첫날. 평범한 인사말에 불과한 첫 대사를 평범하게 못 치고 온갖 시트콤 연기를 해 대다가 주변을 다 실망시키고 며칠을 허비하는 얘기였다. 내 모습 같았다. 100가지를 해내겠다고 덤볐다가 100가지를 다 1%씩 밖에 해내지 못하는 모습. 보잭의 모습으로 나를 보니 그렇게 딱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일산에 갈 사정이 있었다.

백석역 터미널 건너편에는 ‘4050을 위한 새로운 놀이터’가 곧 개장한다는 대형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4050이라면 실제로는 50이 대세인 놀이터일 것으로, 또 일산 신도시 분양 초기에 입주했던 세대가 딱 그 나이대일 것으로 짐작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일산에 가끔 가게 되는 이유도 그 연령대인 우리 삼촌네 집이 있어서다. 신도시에 중장년 놀이터(뭔지 다 알 수는 없으나)가 있는 모습이 생경했다. 평소 일산은 내가 자란 평촌의 거울상일 것으로 익숙해할 준비를 하고 가는 곳인데 이런 건 다르구나. 하긴, (판교나 강남 출근이 수월한 평촌과는 달리) 일산의 내 또래들은 아마 집을 더 일찍, 더 많이 나설 것 같다. 부모 세대 비율이 일산이 더 높은 것일까. 뭐 지금 자세히 알아볼 일까지는 아니다.

그것 말고는 대체로 익숙한 요소들이 이루고 있는 일산 백석역 부근에 갈 일이 있었다. 편찮아 쇠약해진 모습을 몇 주 전에 보았지만 이렇게 빨리 가실 줄 몰랐던 할머니. 밤새 결정될 것들이 결정되고 나서 아침에 곧장 갔는데 왜인지 빈소를 옮기느라고 다같이 몇 시간 기다려야 했다. 병원은 무척 한산했다. 지하 식당에서 먹는데 너무 더운 스웨터 때문에 목이 까끌까끌했다. 흑색 정장 공백 상태를 얼른 탈출해야 한다.

나는 조문을 못한 채로 잠깐 밖에 나와야 했다. 쓰고 있는 글을 위해 어렵게 잡아 놓은 전화 인터뷰가 있었다. 녹취를 하면서 컴퓨터도 쓰려면 조용한 곳이 꼭 필요한데. 카페 한 곳을 갔지만 인근 교회 퇴소 시간이라 내 침 삼키는 소리도 안 들렸다. 별 수 없이 모텔을 대실했다. 밖은 시끄럽고 지나치게 밝은데 모텔 안은 캄캄하고 습했다. 엘리베이터는 아예 버튼밖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창문이 오 센티만 열리는 방에서 충전 케이블들과 의자를 이리 저리 옮기고 나서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아침부터 강아지가 아파서 급히 병원에 와 있어요, 인터뷰 상대도 내게 그 날의 사정을 말해주었다.

나는 우유를 쏟았다.

지난주, 일 년 동안 주된 컵으로 사용해 온 도자기제 컵 하나를 깨트렸다. 내가 산 것은 아니고 동생이나 엄마가 대만이었나 여행을 다녀오면서 현지 스타벅스에서 보고 예뻐서 산, 붉은 게 그림이 그려져 있는 컵이었다. 벽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크기가 적당히 큼지막해서 뜨거운 차도 얼음 넣은 커피도 편하게 마시기 좋았다. 무게가 꽤 나갔기에, 노트북 옆에 식수 컵으로 늘상 두고 마셔도 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늬가 있는 이런 캐주얼한 컵의 장점은 딱히 식기라는 생각(주방에 있어야 할 물건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고 책상 주변에 아무렇게나 있어도 문제없다고 여길 수 있어서,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 그런 점에 퍽 정이 들었다. 사귀는 사람이나 친구 등이 놀러 와서 컵을 주어야 할 때에도 그 컵은 꼭 내가 쓰고 다른 걸 주었다.

그런데 그걸 깨트렸다. 밀린 설거지를 하다가 인위적으로 붙인 속도 때문에 마지막 설거지거리였던 그 컵을 허투루 잡고 닦다가 냅다 싱크대 바닥에 내리쳐버린 것이다. 다행히많은 파편 없이 깨끗하게 세 동강났다. 그걸 버리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컵을 사야지.

뉴욕에서도 컵은 사실 싼 것만 죽 써 왔다. Fishys Eddy의 할인 코너에 가면 일 달러 이 달러 짜리 컵들이 그야말로 쌓여 있다. 그리고 아무리 허접한 벼룩시장이나 중고가게에도 특이하고 얘깃거리가 되는 빈티지 컵들은 늘 널려있다. 그래서 유리컵이라면 두툼한 유리벽에 든든하게 무거운 바닥을 한 큼직한 것들로만 사서 두었다. 오로지 그런 컵 하나로 물도 마시고 우유도 마시고 자몽주스 당근주스 아이스커피도 마셨다. 참 많이 깨기도 하고 이사하면서 잃어버리기도 했다.

컵 하나에 돈을 쓸 입장은 한 번도 되어본 적 없었지만, 물컵에는 돈 아닌 신경조차 많이 쓰지 않았다. 겉멋에 와인잔은 둥근 것 둘, 길쭉한 것 둘 이렇게 갖춰 놓고 살았으면서. 심지어 와인잔은 거꾸로 찬장 아래 매달아 두는 그 잔 걸이까지 있었다. 손님이 오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손님이 온 날에는 그런 컵들부터 나가고, 투박하고 손에 익은 물컵은 변함없이 내가 썼다.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내 취향을 반영한 식기들은 모두 버리거나 나눠주고 와서 부엌 세간은 전혀 남지 않았다. 올 초 재시작한 자취 이래 컵도 그래서 본가에서 쓰던 아이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깨 먹고 나니까 갑자기 그럴싸한 물컵이 갖고 싶어졌다. 칵테일 잔으로 치면 하이볼이나 콜린스 글라스 정도로 얼음을 넣어도 될 만한 용량의. 그리고 헬카페 스피리터스에서 쓰는 물잔처럼 종이처럼 얇고 얼음막처럼 손아귀에 부서져버릴 듯한 그런 물컵을 갖다놓고 싶어졌다. 아, 그 컵. 내가 그 컵이 참 멋있단 얘기를 하자 도무지 그런 데에 왜 신경을 쓰는지 진심으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동행자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 날 나는 ‘그런 걸 신경쓰는 사람’이 되었고 저항하지 않았다.

그 컵(일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트위터 친구께서 알려주었다)을 진짜 살 생각은 없었지만 내 머리속 적당한 유리 물컵의 이미지에는 부합하는 것을 그렇고 그런 주방용품 가게에서 찾았다. 폴란드에서 만든 걸 수입한 모양이었다. 꽤 얇으면서도 내가 설거지해도 살아남을 수는 있을 것 같은 적당한 중간을 가고 있었다. 그걸 두 잔 사면서, 컵들은 다른 식기와 함께 이 층짜리 건조대에 아무렇게나 쌓아 말리는 현 상황이 성에 차지 않아 컵 건조대도 하나 샀다. 집에 오자마자 하나를 더운 물로 씻고 행주로 즉각 말려 자몽 주스를 따랐다. 피스타치오를 집어먹으며 마시는데 참 이게 뭐라고 만족감이 어깨를 주무르는 것 같아졌다. 그 날은 잠을 평소보다도 더 잘 잤다.

애석하게도 그 후 거의 한 주간은 여유가 하나도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기대를 걸었던 순간들은 실망을 안겼고, 일은 많고 고되어 마치 모닥불을 스프레이로 끄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녁에 퇴근해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좀체 물을 따로 따라서 마실 만큼의 여유가 나지 않았다. 오늘, 공휴일인 내일 휴일을 앞두고 집에 돌아와 불 위에 아무거나 (먹다 남은 불고기, 소시지, 버섯…) 볶아서 밥과 같이 먹으며 귀찮은 나머지 물은 2L짜리 페트병으로부터 아무렇게나 벌컥벌컥 마시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졌다. 마음에 드는 컵을 사 놓고 그 컵이 내게 무한한 안정을 줄 것처럼 기뻐할 때는 언제고.

그래서 난 밥을 대충 먹어치운 뒤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매일우유 한 팩과 편의점 치즈케익 하나를 사 올라왔다.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정확히 무지개빛으로 꺼져 가는 저녁 하늘을 감상하면서, 따라놓은 우유와 그걸 잡은 내 손이 얇은 유리 덕택에 얼마나 가까운지 흐뭇해하면서 그걸 먹고 마시려고 말이다. 아참, 포크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내 팔꿈치가 잔을 책상 밖으로 떠밀었다. 본능적으로 잔를 붙잡기 위해 팔이 허공을 휘저으면서 우유 오백 미리가 책상과 바닥과 벽과 의자와 티셔츠와 바지속까지 흠뻑 적셨다. 다행히도 잔은 무사하기에, 걸레와 물휴지는 있돼 자책은 없다.

나는 추석에 어디 안 갔다.

어쩌다 보니 이번 추석은 조촐하게 우리 가족끼리만 보내게 되었다. 추석 전날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러 갔다. 할머니는 어디가 아픈지도 모를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읽은 신문을 칼같이 접어 노끈으로 묶어 배출한다. 옆 집 할아버지 식구에요, 하니까 옆 가게 주인이 주차자리를 내 주었다. 할아버지는 대뜸 나더러 결혼을 일찍 하라고 한다. 지금 한들 할아버지 세대로 치면 일찍은 아니겠으나, 우리 친가 내 세대는 나보다 한참 위 형들부터 결혼 안 하고 버티기로 유명하다. 동생이 나 대신 괜히 결혼 얘기의 표적이 되어줬다.

자기 또래의 사람들이 죽거나, 아니면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의 현실과 무관한 존재로 물러나는 경험이 쌓이면서 나이든 사람은 원하든 원치 않든 각종 상징들이 중첩되어 이름표처럼 붙는다. 세상을 떠난 어른들은 떠나기 직전의 모습으로 기억되지만 더 오래 곁에 있었더라면 또 다른 역할들을 맡고, 또 다른 것들을 상징하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단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있었다는 이유로 오래 산 사람들은 옛날 생각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유난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이 되어간다.

토마토 퓨레에 양파와 마늘, 육수, 잣, 크림 약간을 넣고 끓인 뒤 갈아낸 단순한 수프에 겉면에 마요네즈를 발라 바삭하게 구운 그릴 치즈를 곁들여 같이 추석 아침으로 먹었다. 명절은 많은 사람들이 누가 요리하고 누가 먹는가의 문제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시기다. 이렇게 간단한 식사를 만들면 우리 가족들은 너무 맛있어하며 잘 먹어주고 만든 사람을 치켜세워줘 고맙지만, 가끔 요리사 행세를 하고 박수를 받는 것과 평일 새벽에 타인을 위해 요리한다는 것은 차원 다른 얘기이다. 남자인 내가 자취하면서 자기 먹을 만큼의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을 사람들은 칭찬하곤 한다. 나도 게으른 내가 요리해 먹는 것이 스스로 기특할 때도 있으므로 그런 칭찬을 기꺼이 받아먹기도 했음을 고백하지만, 참으로 부조리한 일이다.

예전에 만나던 남자와 다투어서 주말에 내 집에 평소처럼 놀러올지 안 올지도 모르겠는 상황에서 올 것을 대비해 미리 장을 보고 요리를 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나만을 위해, 또는 특별한 날만을 위해 요리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던 내가 그 날 된장찌개는 정말 죽기만큼 끓이기 싫었다. 요리연구가 ‘빅마마’ 이혜영의 유투브를 틀었더니 그런 사람들 들으라고 이렇게 말한다. 「너무 미워도 굶겨 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 말이 나를 보글보글 위로하더라. 그제야 너무 미워도 굶겨 보낼 수 없지 않느냐는 말로밖에 위로되지 않는 그 보편적이고 부조리한 기분을 이제야 백 분의 일만큼 알게 된 거다.

나는 장볼 때 많이 사는 것들을 나열한다.

뉴욕 살림 5년 했기 때문에 서울 살림도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나 하나 간수하면 되는 원룸 자취라 실제로도 크게 어려운 일은 없었지만, 서울에서 식단을 꾸리고 장을 보고 요리하는 건 처음이라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내 식성에 유별난 점들을 이제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구하기 쉽고, 만들기 쉽고, 싸고, 입맛에 맞는 식사들의 종류를 확보하는 데 가장 재조정이 필요했다. 장보는 곳들이 특별할 건 없다. 신선제품은 이마트와 하나로마트에서, 기타 식료품은 주로 쿠팡을 통해 사고, 치즈나 가공육, 수입 식품, 빵류 등은 한남동 일대의 스페셜티 가게들에서 가끔 산다.

가장 많이 사는 식재료들을 나열해 본다.

  1. 이파리채소: 샐러드용. 로메인을 좋아하지만 긴축을 위해 양상추를 주로 산다. 간혹 엔다이브나 청경채 같은 것을 섞을 때도 있다. 구하기 쉽고 싸다면 루꼴라만 먹었을 것이다. 양배추도 종종 사서 반은 쪄 먹고 반은 채쳐 먹는데 늘 너무 너무 많아서 질린다.
  2. 돼지고기 또는 쇠고기: 돼지고기는 갈매기살을 가장 좋아한다. 팬에 구울 때 기름이 적고 쫄깃쫄깃하며 한식 양식 다 어울린다. 찌개에는 목살을 쓴다. 쇠고기는 미국산 스테이크용 등심을 키로 단위로 사서 얼려 놓았다가 한 끼에 한 덩이씩 녹여 쓴다. 돼지고기나 쇠고기나 단지 그냥 팬에 구울 뿐이다.
  3. 닭고기: 샐러드에는 냉동 닭가슴살을 쓴다. 예전에는 냉동 치킨 텐더를 오븐에 구워서 썼지만 냉동 치킨 텐더는 맛있으려면 소금과 기름이 많이 들어가고 샐러드의 맛을 너무 정해버린다. 탄수화물을 더 줄이고 싶기도 하고 1식 1팬에 익숙해지니 오븐을 켜기도 귀찮다. 가끔 그냥 길 건너 호프집에서 파는 치킨이나 퇴근길에 있는 KFC에서 오리지날을 사 먹는다. 계란은 한 판씩 사서 한 번에 서너 개씩 반숙으로 삶아놓는다.
  4. 유제품: 나는 유제품을 많이 먹는다. 매일우유 2팩씩 늘 비치한다. 습관처럼 늘 저지방 우유를 샀는데 뭐 하는 건가 싶어서 그만두었다. 기름에 절인 페타 치즈 병조림도 늘 있어야 한다. 샐러드에 넣는다. 여러 번 생 페타로 바꿔보려고 했지만 귀찮아서 실패했다. 그리고 스트링 치즈도 꽤 자주 산다. 자주 먹는 간식거리다. 마지막으로 파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를 간혹 사는데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냥 마구 먹어버려서 (참치캔 이런 거랑 먹고 그런다) 정작 근사한 요리에 쓴 적은 별로 없다. 버터는 요즘 안 쓴다. 요거트를 한동안 자주 먹었는데 플레인에 든 당도 신경쓰여서 이제 줄이려고 한다.
  5. 견과류: 나는 견과류를 너무 많이 먹는다. 가장 싸게 구할 수 있는 아몬드-캐슈-피칸이나 호두의 조합이 있으면 큰 통으로 산다. 샐러드나 요거트에 넣는다. 해바라기씨와 호박씨도 샐러드에 꼭 넣는다. 좀 더 귀한 것들, 예컨대 피스타치오나 백잣 같은 것은 저녁에 배고플 때 집어먹는다. 견과류 이렇게 많이 먹으면 아마 안 될 거다.
  6. 밥과 빵: 쿠팡에서 현미밥을 즉석밥 박스채 사서 쟁여 두고 먹는다. 보통 한 끼에 반 쪽씩 먹으면 된다. 빵은 잘 하는 집을 굳이 지나갈 일이 있을 때에만 호밀빵이나 깡빠뉴 같은 것으로 산다. 속이 엉기성기 가벼운 것이 내 식성에 맞는다. 반 밀가루 반 옥수수가루인 또르띠야를 마트에서 팔길래 그것도 자주 사 놓고 타코를 해 먹는다. 후추가 많이 들어간 샐러드 드레싱 류를 양배추와 양파 채썬 것에 뿌리고 고기를 한 덩이 구워서 말아먹으면 훌륭하다.
  7. 그 밖의 채소: 당근이나 셀러리는 땅콩버터 운반용으로 자주 산다. 브로콜리, 가지, 애호박, 버섯은 시간 여유가 좀 있을 때 오븐에 구워서 식혀 놓았다가 이것 저것에 곁들여 먹는다. 향신채 류는 양파, 마늘, 쪽파를 늘 비치한다. 쪽파는 무엇에나 넣는데 한 단을 사면 모두 썰어 반은 얼리고 반은 냉장고에 두었다가 쓴다.
  8. 과일: 연중 제일 많이 사는 아보카도와 바나나는 상태와 타이밍이 특히 중요하므로 집 앞 청과에서 따로 산다. 자몽은 세일할 때 여러 개 사서 잘라서 견과류, 치즈와 버무린 샐러드로 먹는다. 토마토도 비슷하다. 최근에는 당도 높은 과일을 줄이기로 해서 자주 먹던 복숭아나 수박 등은 잘 사지 않는다.
  9. 레토르트: 요즘 자주 사 먹는 조제 식품을 들자면 무인양품 그린 커리, 오뚜기 비지찌개, 피코크 애호박 된장찌개, 피코크 미역국 이렇게다. 모두 하려면 손이 많이 가는 국물요리들이다.
  10. 가공육: 편리하고 저렴하게 단백질을 늘릴 생각을 하다 보니 예전보다 가공육을 분명 더 많이 먹게 된다. 훈제오리, 프랑크 소시지, 어묵, 미트볼 정도다. 어묵의 경우 용산역에 부산미도어묵 집이 있어서 거기서 산다. 생선살 비율도 중요하지만 어떤 고급 어묵은 너무 탱글탱글함을 강조해서 도토리묵 같아져 버린다. 미트볼은 이케아에 갈 때 서너 봉지씩 사 온다. 떡갈비나 너비아니, 산적류 등의 냉동식품은 하나같이 너무 달고 맛에 맥아리가 없다.
  11. 반찬류: 자취 식단에서 아보카도와 함께 돈을 아끼지 않기로 마음먹은 특혜 품목이 바로 명란젓이다. 요즘 이마트에도 팔고 유명한 장석준명란은 덜 짜고 색이 자연스러워 거의 이것으로만 산다. 파를 썰어 넣고 약간의 물과 함께 끓일 때도 있고, 육류나 계란을 구우면서 쓰는 기름에 같이 튀기듯 구울 때도 있다. 밥에 얹고 파를 뿌리면 상황 종료. 김치는 맛김치를 기본으로 파김치와 열무김치 중 하나를 두고, 명이나물 또는 깻잎절임, 삶기만 한 나물류를 사서 덮밥류에 섞어 넣을 때가 종종 있다.
  12. 통조림, 병조림: 어려서부터 형성된 오랜 습관으로 인해 스팸이 찬장에 없으면 불안하다. 참치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올리브나 스위트콘, 케이퍼도 있으면 좋다. 간식용으로 골뱅이를 가끔 사지만 맛있는 건 너무 비싸다. 가장 좋아하는 통조림은 구운 피망인데 한국 마트에는 잘 없다. 쿠팡 직구를 이용해서 주문하려고 넣어 놓은 상태다. 이건 샌드위치에 넣으면 무조건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