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다.

2016년 말 트위터 타임라인 분위기를 요즘 전국 공중파 버전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과연 2018년은 한국의 소위 ‘주류’ 정치·사회·문화가 젠더라는 현실의 축을 더는 외면하지 못하는 해가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건 사실 예측이라기보다는 염원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금방 그렇게 되었고, 그것은 몹시 충격적·압축적인 (혹은 ‘한국적인’) 길로 가고 있다.

2016년에 내가 잘 아는 사람들 중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왔을 때, 나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보탬이 될 지는 거의 확신히 없는 채로 피해자를 지지하고 가해자를 지목해 절연하는 행동을 했다. 내가 사실 해당 분야에서 거의 발언권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게 내 스스로 비교적 옳은 일을 한다는 정당화 말고는 별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가슴을 쓸어내렸던 것은 내가 그런 말과 행동을 했을 때 실제로 누군가에게 즉각적인 도움이 되어서가 아니고, (다행히 아주 약간의 도움은 되었던 것 같지만) 내가 가해자와 잘 아는 사이일 것이라는 짐작, 또 내가 이런 문제에 대해 행동할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때문에 나에게 자신의 피해를 말 못했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점을 서서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평생 자신한테 커밍아웃한 성소수자가 없다면 아마도 자신이 커밍아웃할만한 사람이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처럼, 그 누구의 #me_too도 모르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주변이 괜찮은 주변이어서가 아니고, 내가 그런 사례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으로 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특권은 삶을 편하게 하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는 데에는 도움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