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는 대학원에 가지 않을 것이다.

대학원에 붙었는데, 아마도 가지 않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옳은 결정인데, 적어놓으니 이상한 문장으로 느껴진다.

작년 가을쯤 Parsons의 데이터시각화 MS(Master of Science) 과정을 알아보고 이거다 싶었었다. 정보를 디자인하는 것이 재미있고, 사회학 바탕도 있고, 무엇보다 서사에 대한 감각(내지는 집착)을 저널리즘과 시각디자인에 접목시키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뒤로> 매거진에 보탠 작업도 군대 내 성적 접촉이 현실과 게이들의 환상 속에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설문과 소설 분석을 통해 시각화한 작업이었다. Parsons에서 포트폴리오 데이가 열렸을 때, 그 작업 초안을 가지고 가서 데이터시각화 프로그램 교수에게 의견을 들었다. 아주 좋다고 했다. 나는 디자인으로 디자이너에게 평가를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도 하고, 어쨌든 칭찬을 들으니 들떴다. NY30NY를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갈 준비를 하는 동안 포트폴리오를 꾸리기 시작했다. 서울에 온 뒤 두 달을 집에서 보내면서, 자바스크립트와 React.js, D3 같은 것들을 급하게 공부한 뒤 조금씩 버무려서 인터랙티브한 데이터시각화 몇 점을 만들었다. 다 만들어놓고 보니 왠지 붙을 것은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장학금을 준다면 가고, 안 준다면 재수를 하겠다고 정했다. 그런데 마치, 네 결정은 네가 직접 하라는 뜻인지 합격 통보에는 반액 장학금 제의가 따라왔다. 4일간의 예비군 훈련을 초기 판단에 할애하고, 생각을 막는 습관들을 일시 틀어막았다.

작년의 나는 데이터시각화가 나에게는 그야말로 지금 하는 것들을 잘 뭉친 뒤, 툴과 방법론 약간량만 끼얹으면 되는 분야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기 때문에 1년이라는 짧은 프로그램으로 뉴욕 생활을 재개하고 투자시간 대비 빠른 OPT(취업비자 취득기회)를 노려볼 수 있는 실용적인 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합격 통보를 받고 나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 동안 프로그래밍에 대한 감각이 늘고, 텀블벅에서 데이터뿐 아니라 사용자경험과 프론트엔드 등 분야에서 실기를 연마할 기회가 기대한 것보다도 더 커지고, 내가 개인적으로 만들고 싶은 것들을 구체화하는 일이 팀을 위한 일과 한줄로 겹쳐지는 드문 경험을 하게 됨에 따라, 대학원을 취업과 이민의 발판으로만 쓰는 격인 기존안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가서 어떤 시간을 보낼지 정확한 상상이 가능한 이 프로그램을 택하지 말고, 올해 말에 더 nerdy하고 더 도전이 필요한 학교들 여러 곳에 지원해보자는 데 결정이 닿았다. 뉴욕을 마다하다니, 초현실적인 결정이다.

grown-up
  1. 방문자

    저도 비자가 해결되지 않았던 학부 마지막 해에 데이터 시각화야말로 내 관심사의 적당한 짬뽕이다! 생각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대학원 원서를 쓸만큼 많이 알지는 못했고, 지금은 조금 다른 쪽으로 일하고 있어요. 붙고도 안 가시다니 어려운 결정을 하셨네요. 텀블벅이 운이 좋네요. 화이팅 입니다!

  2. Jay

    합격하고도 뉴욕에 오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리셨다니 잔뜩 했던 기대가 무너져 섭섭합니다만, 설명은 역시 괜저님답다는 생각이 들게 하네요. 괜저님의 뉴욕-미국 생활을 빨리 보고 싶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겠습니다. 뉴욕으로선 많은 손해인데요.

  3.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구글링 좀 했는데 멋있게 살고 있네. 하는 일 더욱 잘 되길 바랄게!

  4. 이태훈

    이런 일이 있었군! 페이스북을 경유해 오랜만에 들어와봅니다.
    파슨스는 파리에도 캠퍼스가 있는 모양이던데~
    준비 잘해서 올해말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