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간이 좋다.

요사이 가장 많이 하는 통역은 개발자어와 경영자어 화상통화 동시통역이다. 외국어 통역보다 까다로운 점은 클라이언트, 멤버, 어카운트처럼 양쪽이 서로 통한다고 전제하고 마구 쓰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가리키는 상황이 무척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어와 영어 통역도 필요할 때가 있고, 학계의 언어와 산업의 언어도 마구 섞여 있어서 가끔은 일과 중 대부분 시간을 소통 촉진에 쓰고 마는 듯하다. 파는 사람에게는 만드는 사람의 집착과 들쭉날쭉한 과정을 설명하고, 만드는 사람에게는 파는 사람의 쫓기는 듯한 목 뒷덜미의 스산한 기운을 전달하려 애쓴다. 두 명이 짝을 이뤄 일을 할 때에, 둘 다 한 쪽 노를 저어서 배가 빙글빙글 도는 것을 보고 있지 못한다.

나는 중간자가 되는 것이 좋다. 중간자는 (돈을 받을 때에는) 통역을 할 수도 있지만, 사사건건 반기를 들기도 쉽다. 착실한 성공니스트들 앞에서는 자유로운 영혼인 척을 하지만, 예술가과 친구를 만나면 내내 먹고 사는 얘기를 후추처럼 뿌린다. 종교인 앞에서 세속적이고 세속인 앞에서 ‘종교적’이다. 남의 낭만을 형광등 아래 놓고 굴리면서 흠집을 지적하고 나서, 그래도 참 귀한 거라면서 슥슥 닦아 돌려주고 나오는 것이 좋다.

지난 수요일에 N+1에서 마련한 MFA vs. NYC 대담에 갔는데, 같은 이름의 글, 책, 그리고 행사를 꿰뚫는 대립구도에서 역시나 끝까지 편을 들지 못하고 나왔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난 사십년간 미국에서 소설가가 탄생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수렴됐다. 한 축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대학 문예창작과들이 이루고 있는 느슨한 망이고, 다른 한 축은 뉴욕의 출판계와 ‘뉴욕’을 먹고 사는 수많은 작가들의 문화다.

MFA 프로그램은 미국이 직면한 세기의 문제에 대한 부분적 답이다. 즉, 이미 스물 두 살까지 길어질대로 길어진 미국인의 청소년기를 삼십 대까지 늘려줌으로써 과공급된 노동 시장에 해답을 꾀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거친 작가들의 글은 흔히 ‘MFA식 글쓰기’라는 정형과의 관계로 정의되기 마련이다. 반면 뉴욕, 특히 브루클린에 바글바글한 자생형 작가들은 출판계 행사 참석과 편집자 눈치 파악을 업으로 하며, 이는 동료들의 작업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항상 위기론에 시달리는 소설 출판계의 짧은 입맛에 맞추기 때문에 여가형 독서에 저항하는 식의 글이 나오기 어려워진다.

최초의 한국계 게이 작가라는 타이틀의 Alexander Chee는 대담 내내 MFA 과정은 「전적으로 교수 하기 나름」이라는 식의 불충분한 옹호에 매진했고, Eric Bennett은 소설 MFA의 원조격인 아이오와 작가 워크샵은 CIA의 개입으로 이뤄진 냉전 시절의 사상전 도구였다는 식의, 흥미롭지만 전압이 좀 안 맞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글의 내용으로 판단할 때 가장 균형잡힌 시각을 가진 듯한 Chad Harbach(소설가, n+1 편집자)는 비개입형 진행자라 큰 기여를 하지 않았다.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 중 분명 작가 수요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작가수업을 받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 모든 것은 소설을 써서 먹고 살기도, 소설을 바꿀 소설을 쓰기도 어려워진 시대에 대한 쿨한 인정에서 논해야 하는 것인데, 「소설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에 대한 답변으로 대담을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일단 뉴스쿨 문예창작과에서 주최한 행사였으니 당연하다.)

이 주제에 대한 말이 길어졌는데, 나는 이런 광경을 보면서 내가 문예창작’만’ 하고 있지도 그럴 생각도 없다는 것에 다시 한 번 안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다 때려치고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토처럼 올라왔으며, 뉴욕대에서 문예창작을 부전공으로밖에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 깊이 감사했다. 이런 얘기를 중국집에서 함께 간 친구 Ben과 열을 올리며 나누고, 하나만 아는 건 모르니만 못하단 생각에 공감하여 서로의 포춘 쿠키를 서로 참조하여 기억하기로 했다.

  1. 문예창작쪽도 미술계랑 돌아가는게 비슷해 보이네요. 종교인 앞에선 세속적이교 세속인 앞에서 종교적이라는 말 정말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