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리가 필요한 사람이다.

방 사진을 올리면 「정리를 잘 하시네요 부러워요」 류의 반응이 많다. 정리하는 것 좋아하지만 물론 더럽게도 산다. 지금 좀 더럽다. 고개를 돌려서 침대를 보니까 이병장과 파프리카에서 저녁 먹었을 때 입은 셔츠가 팔이 둘둘 말린 채 배게에 늘어져 있다. 책상에 빈 잔도 셋 있고 안 버린 재활용 봉지도 좀 있고 먼지도 날린다. 물론 자취방이란 공간의 전형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봐 줄 만 하다. 이 글을 올리고 나서 치울 생각이다.

그러나 더러워지는 과정도, 가만히 보면 정리하기 위해서 더럽히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이게 사는 건가) 정확히 말하자면 정리하는 과정 자체에 정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 사이 물건들이 쌓이고 어지러지는 것. 주변 정리는 인생을 움켜쥐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라 좋다. 일과 중 좌절을 맛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방이 깨끗하면 그냥 쓸쓸하니 포도주 한 잔 걸치고 자고 싶은 정도의 기분이 들지만, 방까지 더러우면 인생 종친 것 같은 상태로 떨어지기 쉽다. 물론 그런 상태를 변태적으로 즐기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정리가 필요한 직책을 맡았다. 내 위 자리가 갑자기 비고, 다른 두 명도 일시/장기적으로 떠나게 된 데다 한편 인턴은 잔뜩 들어오는데, 이게 흡사 내가 막 발령받은 소위인데 병장들이 우르르 나가고 신병을 받는 상황. 사람과 같이 경험치가 떠나버리고 공백이 생기는 것. 도무지 일의 동서남북을 가늠할 수가 없어서 이번 한 주는 업무 정리에 썼다. 군에서도 그럴 만한 게 뭐가 그렇게 있다고 일을 정리하고 분배하는 합동화(coordination) 자체에 집착했었다. 내가 혼자 일할 때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새 보면 혼자서도 그런다.

어제 저녁에 J를 만나서 멋진 신사업을 논의하면서 이 점을 다시 확인했다. 조직을 만들지 않으면 나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많은 것들처럼 결핍에 의해서라고 봐도 되고, 아니 공포에 의해서라고 하는 게 맞겠다. 내 부모님은 작은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 워낙 철저해서, 내 덤벙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장학금 신청 기한 같은 것을 넘길 뻔 하면 (나는 넘겨버리지 않아서 스스로 기특해하고 있는데) 부모님은 대뜸 이래서 어떡할래, 걱정부터 한다. 그래서 나는 달력에 <잡무> 갈래를 만들어 놓고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 처리한다. 지불 업무, 신청, 배송 이딴 것들을 처리할 때 비로소 뭔가 굴러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실 말이 앞서는 성격의 나는, 누군가에게 <말뿐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 몹시 오싹하다.

글을 쓸 때에도, 이야기에 틀이 없으면 구워내질 못한다. 나무 모양을 잡아놓고 씨를 심는 꼴이다. 보고서 같은 것은 그래서 뚝딱 쓰지만, 소설을 쓸 때에는 방해가 된다. 일반적으로 설사하듯 글을 쏟아낸 다음 그 무른 걸로 뭔가 빚어보고 떼어보고 붙여보는 게 순서인데, 나는 벽돌로 반죽을 하려고 애쓸 때가 많다.

  1. 제이 정

    설사와 벽돌을 같이 쓰니까 뭔가 이상해ㅋㅋㅋㅋ 그나저나 이제 내가 간간히 블로그에 등장하니까 기분좋은데 형?

  2.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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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김괜저

    너무 묽은 것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찰흙을 만들겠습니다 🙂

  4.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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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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