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편견에 대해서 (손발이 조금 오그라들지만) 글을 쓴다.

편견은 나도 있고 너도 있다. 편견은 우리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얼마나 인류를 불쌍히 여기고 이웃에 손을 내미는지, 머리는 얼마나 자주 감고 분리수거는 얼마나 잘 하는지와 전혀 상관이 없다. 배에 올라타면서 배를 기울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고, 뭔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가장 최초의 좁은 문을 통과한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작은 것부터 알아서 큰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누군가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해서 그 자체로 욕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러나 둘을 말하는 사람에게 하나를 가져와 따지는 모습이 자신이 아닌지 늘 되물어야 한다. 이것은 「다름을 인정하자」 처럼 좋고 좋은 말이 아니라, 인생과 진실 앞에 겸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싹수가 보이는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이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강조하는 상대에게, 「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이래요」라고만 반복하면 거기서 끝이다. 자신의 신념이 충분히 두툼하고 단단하다면, 남이 하는 말들을 백년 듣고 와도 끄떡없어야 한다. 「공감하고 갑니다」 외의 그 어떤 말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꾸로 그 신념이 무척 연약한 사람으로, 몸이 병약한 사람이 주변인의 부축을 받듯 각개전투같은 토론의 장에서 조용히 뒷문으로 모셔다드려야 하는 분이다. 나도 그런 분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엔 조용히 부축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동성간의 결혼이라는 문제(만약 이것이 진정 문제라고 생각한다면)를 갖고 집에 조용히 앉아서, 스스로 가진 잣대들을 활용해 이리저리 재 보고 나름의 결론을 정리하기에 적당한 때이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귀에 박히게 듣고, 우리가 즐기는 대부분의 컨텐츠가 그토록 끊임없이 절절하게 미화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과연 한쪽이 남자고 한쪽이 여자라는 전제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인가?

만약 당신이 동성애자를 철학적, 영적, 또는 느낌적-느낌적 관점에서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 불쌍한 마음이야말로 부족하게 아는 데에서 비롯된 편견의 산물이 아닌지 진심으로 시험해 보아야 한다. 남을 감싸기에 부족한 좁은 마음으로 함부로 감싸려 드는 대신, 마음을 넓히는 데 주력해야 한다. 만약 그런 마음의 바탕이 되는 신념이 충분히 건강한 신념이라면, 아무리 마음을 넓게 써도 시들지 않을 것이다. 뿌리는 깊이 들어갈수록 멀리 뻗는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제법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은 그 때 그 글에서 확인할 수 있으시다.

  1. 미호

    동성간의 결혼이라는 논점에 관해선 모르겠지만… ㅎㅎ 저도 많이 부축받고 알아서 더듬더듬 뒷문을 찾아 기어나가야 하는 사람인 것 같아서 수줍네요. ;

    저한테 편견은 없애고 덜어낼 게 아니라 살면서 자꾸 늘어갈 수 밖에 없어서… 계속 지켜보고 고르고 다듬으면서 관리해야 할 게 아닌가 싶어요. ‘택하고 행해온 자취들이 결국 내가 갖고 있는 편견의 산물인데’, 언젠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쓰시는 글과 올려주시는 사진 늘 잘 읽고 보고 있습니다. 건강히 지내세요.

  2. 김괜저

    고맙습니다. 건강히 지내세요.

  3. 마말

    <나는 싫어할 권리에 웃는다>에 달린 답글 읽어봤는데, 너가 참 답답했겠다 싶더라.

  4. 김괜저

    자꾸 오이 얘기하시던 분이 생각나

  5. 실밥

    요즘 제 상황에 잘 들어맞는 글인거같네요 좋아요
    이 말은 좀 모순적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편견이 있으며 그것을 너무나도 맹신하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선 어떻게 하는게 최선일까요?

    1. 김괜저

      가장 강력한 방법은 본인이 편견을 가진 사람을 직접 만나보고 교류를 갖는 것이겠죠. 그게 어렵다면 문학이나 영화 같은 컨텐츠를 권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