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극기 이야기를 썼었다.

당근 주스 + 오렌지 주스 + 코코넛 물을 섞으면 좋다.

시간이 급하게 간다. 맞맞맞후임이지만 맞후임같은 기수가 전역했다. 대학원 합격 소식도 막 들린다. 이제서야 내가 군에 있는 동안 다른 친구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O와 일요일을 통째로 함께 보내며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O하고 할 말이 없는 상황은 태어나서 한 번도 없었다.

문예창작 교수 Marcelle은 은근히 내가 군생활에 대한 글을 써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삼일절이 되니 작년 삼일절에 부대에서 쓴 글이 생각난다. 제목은 <태극기>. 손으로 쓴 원본이 지금 없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

경사 심한 달동네 초입에 사는 순정 할머니는 올해로 일흔이다. 같이 사는 열 살 위 할아버지는 참전용사이자 육급 국가유공자인데 사십대에 일터에서 불의의 사고로 불구가 되었다. 그 뒤 순정 할머니가 시누이가 하는 시내 떡집에서 일하며 부족한 생계비를 번다. 할아버지는 보훈병원과 전우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순정 할머니는 국경일을 싫어한다. 할아버지가 새벽같이 일어나 태극기를 내걸라고 호통을 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사 온 크고 무거운 태극기를 베란다 난간에 잘 보이게 꽂아놓아야 한다.

겨우내 몸이 좋아지는 것처럼 보이던 할아버지가, 삼일절을 몇일 앞두고 상황이 갑자기 악화되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장을 치르는 동안 연락 끊고 살던 자식들, 전우회 사람들 등쌀에 시달린다. 순정 할머니는 떡집 일을 그만두고 사망일시금과 모아둔 돈으로 생활을 시작한다. 할아버지 물건은 모두 치워버리고, 할아버지 편만 들던 시누이도 보지 않는다. 노인정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 기일이 돌아온다. 혼자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를 지내느라 무리한 순정 할머니는 몸져 눕게 된다. 그렇게 며칠간 홀로 앓던 할머니는 삼일절 아침, 문득 할아버지와 태극기 생각을 한다. 무엇에 홀린 듯 태극기를 장롱에서 꺼낸 순정 할머니는 아픈 몸으로 베란다에 기를 내걸다가 창밖으로 떨어져 죽는다.

그 후 국경일별 단편소설을 하나씩 써서 묶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흐지부지되었다. 쓰다 만 얘기야 수십 개가 있지만, 이 얘기는 작위적인 느낌 없이 써내기가 너무나 어려워 답이 안 나옴에도 불구하고 좀 애착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