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돈을 충분히 벌고 있다. 아니다 충분히 못 벌고 있다.

이 글은 문재인 담쟁이펀드에 어서 가서 돈을 넣으라는 내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습니다.

제법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 이러이러한 값에 일 해주겠냐는 말을 들었을 때 와 충분하다 당장이라도 하지 하고 속으로 말했다. 복학 안 하고 일 년을 할까 하는 생각을 10초 정도는 했다. 10초의 진심을 할애한 건 아니고 0.1초짜리 생각을 산수가 느려서 계산하느라 좀 걸렸다.

요즘 친구의 취업 준비를 아주 조금 거들어주고 있는데 같이 한숨 쉬어 주는 것 말고 크게 해 줄 말이 없는 얘기들도 있다. 추석 전날을 골라 기업들이 다같이 결과를 통보했다는데 심사 끝내놓고 명절 보내고픈 회사 입장은 알겠는데 열 곳 스무 곳 우수수 떨어지는 준비생들은 무슨 재미로 명절을 쇠라는 배려였을까. 또 한 친구는 제법 먼 에버랜드에서 애들 뒷바라지 아르바이트 하는 생활을 실시간으로 알려오는데 좌충우돌 모험담들이 재밌다가도 잠깐씩 짠해진다. 전역 후 취업한 군대 동기들(준비중인 동기들도)은 다들 전투태세다. 이병으로 돌아갔다는 상태 알림만 몇 번을 봤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이등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잠깐이라 하는 일이지만 월 단위로 계산해 보면 내 생활에 충분하고도 남아 모을 만한 돈이고 작업 환경도 좋다. 자아성취나 문화적 공감까지 가능한 직장이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게 가능하면서도 돈이 되는 곳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이 입증됐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내 수준에서 충분하고 남을 돈을 벌고 있다.

그러나 이 년 동안 안 산 옷을 사 볼까 해서 어제 근처에 들른 김에 (하필이면) 명동에 가서 보니 나는 전혀 돈을 충분히 벌고 있지 않았다. 무시하고 싶은 표들이 살 수 없는 가격을 달고 있으니 묘하게 자존심 상했다. 예를 들어 에이랜드가 저렇게까지 잘 되는 것이, 뭔가 값비싼 수입화장품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산 국산이 더 비싼 것 같은 그런 기분(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이 들어 참 언짢다. 요새는 거의 수입품 가게가 됐지만…….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고 집에 왔다.

이튿날 월급을 떼어서 문재인 담쟁이펀드에 넣었다. 큰 돈을 넣고 싶은데 큰 돈은 없다. 한달에 이만원 씩 이 년 넘게 나가던 국제난민기구 후원금은 이번달 계좌를 정리하면서 더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돈이 충분하다는 말은 없어도 좋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1. loana

    담쟁이펀드에 돈을 투자하셨군요. 제 벌이에 대해서는 김괜저님만큼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 적정 생활규모를 유지할만큼인지 확실치 않으나 저도 곧 ‘투자’를 해보려 합니다 : ) 그나저나 ‘김괜저’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요…? 이전에는 이렇게 불렀던 것 같은데.

  2. j

    돈, 돈, 돈, 돈, 돈이 충분하다는 말 인생에서 한번 쯤 해도 사는 맛이 날것같아요.

  3.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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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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