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휙휙 걸었다.

집에 돌아와 30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대치동으로 출근했다. 지난 번 말했던 참고서 디자인하는 일이다. 아침 10시 30분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내 컴퓨터로 일하는데, 근무시간도 좋고 동네도 잘 아는 곳이고 같이 일하는 분들도 무난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편하게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무리가 없다. 그래서 제대 직후 제대로 쉬지도 놀지도 않았고 개천절에도 출근했지만 그다지 강행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곧바로 입을 수 있는 규칙적인 일상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예비역 1주차라 아침 일곱시 전에 틀림없이 일어난다. 우리 가족은 아빠, 엄마, 나 순으로 출근하는데 두 명이 함께 아침을 먹는 일은 왕왕 있어도 셋이 한꺼번에는 아무래도 무리다. 그러려면 내가 부대에서처럼 일어나야 하는데 특히 낮이 짧아지면서 한밤처럼 캄캄할 때 일어나는 것은 특별한 날에만 하고 싶다.

디자인 일을 하면 주위에서 「할 줄 아는 게 많아 좋겠다」고 해주는 말을 나도 조금 실감한다. 재수없겠지만 이거 잘 해서 좋은 점이 제법 많다. 내가 글을 쓰는 것으로 성공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백두산이라면 디자이너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관악산만 넘으면 된다. 야트막할 뿐 아니라 집에서도 가깝다는 것까지 통하는 비유이다. 평소의 내 모습에서 몇 발짝만 움직이면 그럭저럭 디자이너로 작동할 수 있는 태가 된다.

퇴근하는 길에 오늘은 대치동을 관통해서 양재 방향으로 걸었다. 도곡 부근에서 권상우를 보았다. 달리기를 했는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도 땀이 날 때까지 오랫동안 걸었다. 동네 빵집에서 바게뜨를 사서 저녁 대신 뜯어먹으면서 걸었다. 젊은이들은 강 건너 시청 앞 싸이 공연에 가는지 목요일 저녁치고는 활달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에 귀에 꽂은 것에서 나오는 노래를 대강 대강 부르면서 휙휙 걸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 몇 시간이나 빈다고 그걸 또 생각없이 학원가 걷는 데 쓰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뜯어먹는 빵조각이 달았다.

─ 장기하와 얼굴들 : 그때 그 노래
  1. lime

    “낮이 짧아지면서 한밤처럼 캄캄할 때 일어나는 것은 특별한 날에만 하고 싶다” 완전공감해요~

  2. 아무개

    비공개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