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상을 비운다.

일요일 오전에 사무실로 넘어와서 혼자 책상을 비우고 있다.

제일 많은 것은 책인데 거의 다 쌌다. 보급과에서 더블에이 종이상자를 여러 개 구해 왔다. 나는 이 종이상자를 그대로 못 쓰고 뜯어서 안팎을 뒤집어 청순한 연갈색이 밖으로 오게끔 재조립해야만 내 물건을 담을 수 있다.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나인데도 그렇다. 예전에 미국에서 프랑스로 짐을 부칠 때에도, 혼자 쓰는 창고에 짐을 둘 때에도 그랬다. 필요 없는 일을 해야 개성이 생기는 것 아닐까요. Y는 안 예쁜 건 먹지도 않고 굶어죽을 위인인 날 측은하게 보았다. 고마운 일이다.

많기도 하고 정리하기도 쉬워서 책을 먼저 다 싸 놓고 나머지를 어떻게 정리해서 얼마나 솎아 버리고 챙겨서 부칠까 하는 구상을 하면서 잠깐 쉬는 중이다. 당번실에서 유리잔과 얼음을 가져다 교수휴게실 커피를 원액 세 잔어치 받아 찐하게 마신다. 친한 장교들에게 커피 농축액을 페트병에 담아 선물할까 한다. 원두 갈아 놓은 것을 처리하고 가야 해서이기도 하지만, 병사가 장교에게 할 만한 선물은 노동이 집약된 저자본 품목이 적합하므로. 아, 냉장고 아래칸에서 하루밤을 묵은 얼음장 같은 커피에 얼음을 더 넣어 게토레이처럼 들이키던, 정말 군대같이 더웠던 계절이 갔다.

출근할 곳이 생겼다. 전역 다음날은 휴일이고 그 이튿날부터 바로 대치동으로 출근한다. 이미 내가 해 본 밥벌이 중 가장 전문성을 갖춰 버린 유학/영어교육 참고서 편집과 디자인 일이다. 디자인 관련 작업기록에 포함시킬 수 없는 일은 않겠다는 자존심으로 멀리했던 과외까지 불사해서라도 목돈을 마련해 놓고 가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천적이는 언제까지 자존심 세우나 했다며 웃었다) 잘 된 일이다. 어쨌든 내가 사교육 일로 돈 챙기고 있소 하는 광고를 여기저기 할 필요 없이 골방에 틀어박혀 할 수 있는 일인 데다, 강습이나 참고서나 학원가 장사라는 일말의 부끄러움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소비자를 대면할 필요 없이 비겁하게 일할 수 있으니까. 문득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생각하며 주위를 환기하면 그냥 돈은 돈인데, 하며 물불 안 가려도 좋지 않냐는 말이 들리는 것 같은데, 하루하루를 국정감사처럼 사는 나에게 완전히 마음이 편하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1. 앞발

    매일을 국정감사처럼 보내신다니, 문장만큼이나 삶도 아주 촘촘하게 사시는군요. 이 글은 다음 글과 더불어 어딘지 전에 말씀하셨던 사회학 연구를 기대하게 하네요. 늘 지켜보고 마음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2. 김괜저

    촘촘하게 산다는 표현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