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진기 가방을 하나 만들 것이고, 그러면서 유물론과 실존주의에 대한 생각을 이을 것이다.

사진기 가방을 하나 만드려고 준비중이다. 인조 가죽으로 할지 두꺼운 면으로 할 지를 못 정하고 있다. 같은 소재로 렌즈통까지 만들 것이라 고려 사항이 많다. 무엇을 만들든 목표는 「흔히 살 수 있는 것보다 낫게」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자잘한 걸 만드느라 시간을 털어버리는 내게 ‘조잡이다’라는 말로 자극을 가했고 그것은 결국 취미활동 수준의 공작에서 그칠 거면 시작도 말라는 완벽주의로 이어졌다. 왼손 검지에 포악하게 꿰맨 상처는 고등학교 때 책을 재단하다 생긴 것인데, 남자의 상처라기에 좀 민망하긴 하지만 스파이더맨이 거미에 물렸듯 뭐랄까 만들기 영웅이 되기 위한 여정의 시작(…)으로 볼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손재주와 공작에 대한 깊은 관심은 현실과 물질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내 본능적(‘근본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인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믿음과 문화, 인간사와 역사도 현실적인 객체로 인식하는 사회학의 본바탕과도 통한다. 그러나 나는 진정한 유물론자(materialist)는 아니다. (사회학 탐구 과정에서는 철저한 마르크스식 유물론자가 맞지만) 사회현상과 역사, 문화와 같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현실에 대해서는 유물론을 바탕으로 인식조차 현물화하여 탐구하는 것이 옳다고 느끼지만 그렇게 해서 도달할 수 있는 진실에 대해 역으로 주관적 관념론(subjective idealism)의 입장에서 인간의 인식 밖을 무의미 처리하는 것이 나의 경향이다. 참으로 모순된 경향이지만 이 접근의 방향 자체가 이 모순성으로 인해 탈락 처리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내게 철학적으로 유의미한 자의식이랄 만 한게 아직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다면 두 개의 강력한 끈이 양 쪽에서 잡아당기고 있다. 한 쪽은 마르크스식 유물론이고 다른 쪽은 사르트르식 실존주의(existentialism)이다. 현재 나는 현실에 대한 해석을 유물론에 맡긴 채,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인간됨의 공허함을 실존주의로 극화하여 위안하고 있다. 유물론과 실존주의가 정확히 어떠한 벤 다이어그램으로 맞서야 하는지는 아직 생각과 배움이 더 필요하다. (군데군데 읽었지만 체화하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인간이 ‘의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과 ‘의미’ 따위는 애당초 없다는 것 모두가 사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냥 인간이란 애 쓰며 살아가는 병신이라 할 수 있다. 내게 ‘의미’와 ‘자연발생적 기초가치’ 따위를 인정하는 것은 믿음의 뜀을 뛰어야 도달 가능한 결론이다. 친구와 소주 두 병 걸치고 와서 아무렇게나 쓴 이걸 진지하게 읽고 반 바닥 반론을 댓글로 다시는 분은 없겠지 있으면 큰일인데……. 나중에 제대로 정리해서 써야겠다.

  1.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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