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간만에 사진기를 보고 있었다.


Nikon D7000 with Nikon SB400

나는 사진에 돈을 무척 많이 썼다. DSLR을 처음 쓰기 전에도 비싸고 무거운 고급지향(high-end) 기종을 가지고 다녔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사진기 욕심으로 유명한 아버지(51, 나먼저족1)를 졸라 처음 산 DSLR이 중·고급기인 D200이었으니 시작부터 현금을 많이 흘렸던 것이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잃어버렸다……. 유학 생활의 두 번째 고비였다. 첫 번째 고비(백이십만원짜리 사기)로부터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다.
다행히 삼 년 동안 고비가 더는 오지 않았다.

나름 자숙의 기간 열 개월을 거쳐 새로 산 D300을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잃어버린 번들을 제외하고 입문할 때 산 표준 단렌즈에 가격 대비 성능이 월등한 초광각 줌,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뜻밖에 건진 저렴하고 상태 좋은 망원줌까지 쓴 돈에 비해 굉장한 구색을 갖춰주는 후회 없는 렌즈들을 가지고 있다. 사진기를 이천칠년 겨울에 그렇게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삐까뻔쩍한 렌즈에 헛돈을 더 많이 썼을지도 모르지만 손실의 가르침 덕택으로 기계 탓이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을 그나마 깨달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300 이후 몇 년간 눈 돌아가는 중급기들이 여럿 나왔던 것은 맞다. 내가 진중하게 사진에 철학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동영상 촬영 같은 것에 혹할 리 없겠지만 난 단색에 가까운 흐릿함에서 몇 밀티미터짜리 매크로 포커스로 링 돌아가는 힙스터다운 영상을 만들고 싶단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나만 듣기엔 「얜 이런 특별한 노래를 들어?」하는 남들의 인정이 없어 심심한 아무도 모르는 멋진밴드의 음악을 배경으로 깔 껀데 오디오 녹음상의 장애가 대순가?

아마 전역할 때까지 사진기 본체나 새 렌즈를 사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 D7000 정도로 무게를 조금만 줄이면 아주 좋을 것 같기는 하지만 일단 꼭 필요한 플래시를 하나 사는 정도로 계획을 그쳐 두는 게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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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ly adapter의 순우리말로 소개된 단어. 좀 우스꽝스러워도 외래 신조어를 번역해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도 너무 창피하다.

  1. sunho

    안그래도 저 D7000 사려고 했는데 혹시 추천하실만한 렌즈 있나요?
    이제까지 D50의 번들렌즈와 아이폰으로 버텨왔는데
    여유가 있어져서 하나 살까 하는 차에 저거 꽤 좋더라고요.

    아, 아시겠지만 저도 저렇게 매크로 포커스로 힙스터 영상 만들고 싶어
    렌즈 사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저 한국 좀 있을 것 같은데 전역하면 한 번 뵈요.

  2. 김괜저

    ㅜㅜ 전역은 일 년 남았는데 기다려 주실 수 있습니까
    렌즈는 갖고 계신 번들이 뭐냐에 따라 달라질 듯하지만 18-55라면 더해서 광각줌과 100이상의 망원 단렌즈 또는 줌렌즈를 사는 게 쉬운 답일 것 같아요.
    새로 시작한다면 18-200 하나랑 50 이렇게 둘로도 충분하겠죠.

  3. 한결

    넌 항상 존나 솔직하구나.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