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 오던 삼일을 생각한다.


별건 아니고 그냥 비가 참 시원하게 내린 날이었다. 파리는 늘 흐리고 자주 습하지만 기운나게 비가 쏵 쏟아지는 적은 또 많지 않다.나는 장마를 아주 좋아해서, 발목까지 빗물이 차는 날이면 더러워진 것들을 입고 학의천 같은 곳으로 나가서 맞곤 했다. 아니면 부안초 앞 육교에 올라갔다. 비 오는 날 굳이 육교를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므로 혼자 차들이 비 아래로 지나가는 것 보는 데 좋았다. 또 한가람피아노 이층 밖으로 석누조처럼 삐죽 나온 쇠관에서 무지막지하게 떨어지는 물줄기 밑에 우산을 머리에 바짝 대고 서서 폭포수를 놀았던 것도 생각난다. 비를 생각하면 아주 어렸을 적의 정신과 곧바로 통한 것 같은 세월초월의 상태를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 김추자 : 빗속의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