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 버렸다.

나는 초는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성냥은 무진장 좋아한다. 지난 여름 시카고에서 산 작은 통에 가지고 다닐 때도 많아서 라이터 찾는 친구들이 종종 고마워하기도 한다. 오늘은 방에 한 자루 남은 흰 초를 다 태워버리고 가야겠다 싶어서 하루종일 켜 놓았는데 반 밖에 타지 않았다. 성냥을 켜기 위해 한두 시간마다 일부러 불어 껐다.


Delfin-Postigo house via yatzer

요새 시간이 없어서 매일 들르던 사이트들을 일일히 가 보지 못하고 그냥 RSS로 대충 훑어보는데, 이사 중이라 그런지 인테리어 관련 블로그들에 눈이 제일 간다.
부엌 선반에 비커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흑설탕 하나는 미숫가루였다. 미숫가루는 자주 써서 하늘하늘 신선했고 흑설탕은 그냥 둔 지 오래 되서 꽝꽝 굳었었다. 하지만 싱크대에 버리는 건 흑설탕이 훨씬 재밌었다. 딱 십 초면 다 녹아 흘러가고 없게 되는데 깔끔한 모습이 많이 사랑스러웠다. 반면 미숫가루는 끔찍하게 진득하게 변하므로 물에 흘려버릴 수가 없었다.
많이 버렸다. 무쇠 냄비도 버렸고 돗자리도 버렸다. 잡지는 거의 트럭이 필요할 정도의 양을 버렸다. 나름대로 몇 번에 나눠 버리려고 한 것이었는데 그래도 매번 많았다. 점심과 저녁으로 남은 통밀 펜네를 다 삶고 파프리카와 양파, 마늘에 호두와 잣이 든 페스토를 전부 써서 부엌 청소치곤 맛이 썩 좋은 파스타를 해 먹었는데, 오래 방치해 둔 도마 위에 호일과 종이행주를 깔고 야채를 썬 뒤 야채 찌꺼기와 함께 도마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기분은 참 통쾌하기도 하고 미련스럽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하고 죄책감도 약간 드는 그런 복잡한 심경, 아마 오늘 하루 역시 온통 딱 이 기분이었던 것 같다.

  1. 준범

    형 사진 잘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

  2. 고기딖따

    괜저야 프랑스로 이번학기 출국이니? 만약에 출국하면 언제?

  3. 김괜저

    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