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 끝내고 떠났다.

괜시리저렇게 블로그가 손으로 쓰는 일기장이었다면 지금쯤 아마 너덜너덜해졌을 것 같다. 근 4~5일간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일하느라 너무 바빠서 포스팅을 하지 않았는데, 이 너댓 날의 공백이 한 한 달은 방치해 둔 듯한 기분이다. ‘사람이 이렇게 바쁠 수가 있다니!’
오늘은 제대로 길게 늘어놓을 테니까 마음을 단단히 먹어 달라. 내가 그토록 바빴던 이유는 유학 관련한 수험서 시리즈의 안팎을 디자인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인데, 그리 창의력을 자극하거나 디자이너의 ego에 획을 긋는 성격의 일은 아니지만 (세주와 대화하면서 나는 이 과정을 artistic prostitution이라고 일컬었다) 내가 책임졌던 프로젝트 중에 가장 규모가 컸기 때문에 심신에 큰 압력으로 작용했다. 지난 여름에 원래는 집필에 참여해 달라고 제안받았던 것을 싫다 디자인 시켜 다오 해서 시작한 일이다. 자세한 내용은 얼마 뒤에 좀 더 정리되면 다시 하겠다.

나 스스로 얼마나 바쁜지를 깨달은 것은 한 2주 전이었다. 그 전까지는 내가 좋아하는 ‘바빠도 놀 건 놀고 쉬는 대신 일하자’ ‘친구 만나는 것은 생산적 활동이다’ 따위의 소신을 지키면서 세주와 강남에서 만나고, 천적이와 신사에서 만나는 등 모범적인 스케줄을 잘 이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수베와 드래곤을 평촌으로 불러 밥 먹고 놀기로 했던 날이 그 날이었다. 출국 하루 전이었던 천적이는 오려다 못 왔고 우리 셋은 안양 1번가에서 닭 요리 이것저것을 먹으면서 즐겁게 놀았다. 멀리서 온 이들을 잠실 가는 버스에 태워 보내고 나서 돌아왔는데, 별 이유는 없이 갑자기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앞으로 평생 마음이 편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신사에서 압구정까지 천적이와 걸어가면서, 핑싸를 보러 같이 대전에 내려가기로 했던 계획에 대해 얘기했다. ‘너 이렇게 빨리 가는 줄 몰랐어 한 다음 주 쯤 가려고 그랬지’ 난 천적이가 너무 빨리 출국한다고 하면서, 나라도 다음 주 중에 가야겠다 했었다. 그런데 웬걸, 천적이 출국한 날 뒤로 일주일간 나는 대전은 커녕 매일 통근하다시피했던 서울도 못 가고 집에만 갇혀 살았다.

태어난 이래 가장 잠을 적게 잔 일 주일이었다. 부모님도 쉬라고 쉬라고 하다가 체념한 상태였다. 성희는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알아서 편의점에 들러 스타벅스 컵과 칸타타를 사다 줬다. 엄마는 나와 같이 바빴는데 대학원 과제 때문이었고 우리는 번갈아 스타벅스에 가서 각자 마실 커피를 사 왔다. 이렇게 바쁜 적은 처음이었지만 내가 시간이 많았던 지난 여름보다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은 결과적으로 훨씬 길었다. 서로 그렇게 바쁘면 어떡하냐고 걱정을 했다. 하지만 물론 엄마가 내 걱정을 훨씬 많이 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뉴욕으로 출국한 11일 아침까지 난 조막만한 맥북 화면만 들여다보면서 살았다. 밤 늦게 성희가 서재에서 자기 방으로 돌아간 뒤 한 두세 시간 지났나 싶으면 벌써 아빠가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는 신기한 과정이 매일 반복되었다. 이제 Adobe InDesign은 쳐다보기도 싫고 Gmail을 체크하기가 두렵기까지 하다. 쉴 새 없는 마우스 작업으로 손목에도 무리가 왔다. 편집 디자인은 결코 창조적인 작업이 아니다. 기계가 모자라서 내가 하는 것뿐인 고된 일이다. 그냥 대충 읽을 수 있을 정도만 하고 끝내 버리고 싶은 욕구가 이렇게 강하게 느껴지는 일에서 실재로 아름다운 디자인을 만들어 완성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저지르는 것인지 뼈져리게 느꼈다.

그렇게 일을 겨우 끝낼 즘에는 공중부양 정도는 껌 씹는 것 보다 쉬울 것 같은 저세계적인 심신분리가 이뤄졌다. 몸보다 생각이 더디 흘렀다. 결국 학교에도 못 가 보았고, 할머니 할아버지 말고는 친척도 아무도 못 만났고, 친구도 기모임 아니었으면 얼굴조차 못 보았을, 보통의 나였다면 꼭 개인적으로 만났을 사람들과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말았다. 새해 벽두에 종각에 가 보려던 계획도 슬그머니 취소했고, 핑싸한테 쳐우는 이모티콘을 던지면서 대전 계획도 취소했다. 우리 가족은 나 혼자 바쁜 게 아니어서 연말 양양 리조트에 가려던 계획도 취소했다. 수베와 옷 사러 가려던 계획도 없어졌고 드래곤하고 체중계 어쩌고 하던 얘기도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출국 당일, 일이 100% 완료되기 직전이었지만 그렇게 끝낼 수는 없어 엄마와 신세계 강남점까지 같이 가서 별 거 사지는 않았지만 둘러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결국 일은 뉴욕에서 하루 밤을 더 새고서야 끝났다. 세상에나, 비행기 안에 있는 시간이 더 마음이 편했던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다. 집에서 일하는 내내 빨리 뉴욕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Across the Universe 하나를 보며 왔다. 워낙 좋아하는 노래들에 매력적인 배우들이 많아서 전반적으로 괜찮았는데 약간 ‘뮤즈 뮤직비디오’스러운 면도 있어서 무작정 좋아지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Strawberry Field Forever 부분이 제일 괜찮았고 I Want You나 I Want To Hold Your Hands는 살짝 별로였다. 주인공 이름을 Jude로 정하고도 Hey Jude가 생각만큼 강력하지는 않아서 그 부분도 약간 아쉬웠다. 하지만 비틀즈를 향한 오마쥬와 함께 뉴욕을 바탕으로 워싱턴 스퀘어 파크와 시립도서관 등 우리 동네가 많이 나와 친숙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뉴욕에 도착했지만 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네 끼를 Whole Foods Market에서, 한 끼를 The Goodburger에서 평범하게 해결하며 방에 틀어박혔다. 23인치 시네마 디스플레이를 누비게 된 것은 반가웠지만 전부 작업의 효율성을 위함이라는 게 억울했다. 룸메이트 Jacob과 건넛방 Austin은 이미 방에 들어와 있었다. 이유는 불분명했다. 아직 개학은 꽤 남은 시점이었다. 어쨌든 뉴욕에서의 이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방에서 말고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도 없었다. 방은 그냥 JFK공항에서 Newark공항으로 가는 중 잠깐 들른 듯한 기분이었다.

뉴저지의 Newark국제공항에 도착한 나는 아직 서로 잘 몰라 서먹서먹한 소년소녀떼와 함께 서너 시간 기다린 끝에 피렌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드디어 맨 앞의 사진의 정체가 들어나는 순간이다. 옆 자리가 비었길래 내 물건 놓고 팔 쭉 펴고 편안하게 자면서 왔다.

목요일 현재 나는 같이 온 소년소녀떼들과 굉장히 친해졌고 피렌체의 호텔에 있다.

  1. diana

    와 피렌체…. 넘 부럽다. 근데 너 벌써 너무 working yourself to death를 연습하는거 아냐? 건강관리 잘해

  2. camus

    엥? 지금 피렌체야? 좋겠다..ㅠㅠ 거기 진짜 이쁘지..근데 많이 피곤해보여 좀 쉬면서해~~

  3. ko-un

    파리에서 그런 소년소녀떼들을 만났었는데; 뭐든지 잃는 건 한순간이더라구요. 건강 조심하세요.ㅎ_ㅎ

  4. 쥰_

    정말로 오랫동안 뜸했던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괜시리님의 포스팅이 그리웠다구요 흙ㅋㅋ

  5. 강변

    정말이지 반갑습니다. 이런, 드뎌 뉴욕 귀환이구나 했더니 어느새 피렌체…전 개인적으로 현대의 피렌체에 실망도 하였지만, 그냥 “보러” 간 사람과는 다른 것을 담아오시리라는 기대가 큽니다. 많이 보여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건강에 유의하시고요.

  6. 역시나그렇게

    diana샘: 정말 정말 중요한 건강관리.
    까뮈: 벨라 삐렌-쩨에서 잘 쉬고있지
    고운님: 잃는 건 한순간이라는 것은 지난해의 교훈 명심할게요.
    비공개님: 해피엔딩~! 한 사흘간 비가 왔고 지금은 화창합니다. 전 비 오는 걸 좋아하기에 마냥 좋았죠 뭐.
    쥰님: 새 닉네임 좋네요. 쥰님 쥰님.
    강변님: 담아오는 것도 많지만 스트레스와 피로는 여기에 잔뜩 풀고 갑니다.

  7. 카방클

    피렌체!! 피렌체 피렌체 피렌체 피렌체 피렌체 피렌체!!!!! (다른 글들은 허공으로 사라져간다)

  8.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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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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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역시나그렇게

    방클님: 피렌체 피렌체 피렌체 피렌체 피렌체!
    비공개1: 너 아니야 걱정하지마ㅋ 나도 아직 못 봤다
    비공개2님: 맞아요 여행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글루스 회원이신 경우 로그인 상태로 남기신 덧글 내용은 확인하실 수 있지만 비로그인시엔 본인 덧글도 안 보입니다.

  11.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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